일찍이 화가로서 명성을 드높였으나, 재테크의 성공여부에 따라 말년의 인생이 달라졌던 화가로 스페인의 고야와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있다. 동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건이 너무나 비슷하다. 하지만 말년은 극명하게 다르다.
 돈의 중요성을 잊지 않은 고야

 재테크에 성공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를 먼저 이야기해 보자.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 가면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 두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다. 당당하면서도 도발적 시선의 모델을 그린 그 작품이 고야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면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외설시비까지 불러일으킨 작품이지만, 고야는 초상화를 많이 남긴 작가다.

 고야의 초상화는 그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관찰자로서 모델의 특성과 기질을 세밀하게 연구했다. 그는 자신이 본 모습만 그리지 않고 모델이 가지고 있는 왜곡할 수 없는 진실을 그렸던 것이다. 고야의 작품들을 보면 생생한 역사를 느끼게 해준다.

 옛날에는 사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화가의 그림이 개인의 역사는 물론 국가 역사까지 기록했다. 묻혀 버릴 삶의 기록이 화가의 손에 의해 영원히 살아났고, 역사를 기록하는 화가는 항상 정치권이나 상류층 곁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계층보다 출세하는 게 쉬웠다.

 왕실에서 주문을 받아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부터 시작한 고야는 1772년 첫 프레스코화가 완성되면서 천재성이 드러난다.

 자신이 도움을 받은 만큼 꼭 갚는 성격인 고야는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다. 항시 재정문제를 염려해 온 그는 궁정화가(당시 궁정화가는 월급이 있었다)가 되기를 원했다. 기본적인 생활비가 해결되는 것은 물론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초상화 주문을 쉽게 받을 수 있어  부를 축적하기에 적합해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고야의 천재성에 상류층은 빠져들었고, 상류층의 관심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1789년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마침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어디다 투자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게나. 은행이든 왕실이든, 채권이든 기업체이든, 아무데고 이윤이 가장 많이 나오는 데로….”(1789년 5월23일 편지)

 현실에 발목이 잡혀 그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화가들을 많이 보아온 고야는 예술의 자유는 경제적 자립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돈이야말로 그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던 고야는 천재성과 실리적 감각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투자전문가를 만나 자신의 재정문제를 상담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지배세력의 변화로 7년간 추방되었다(당시 나폴레옹시대). 정치바람이 고야를 변방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고야는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후원자를 찾아 그림을 그렸다.

 그가 온갖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축적한 재산 덕분이다. 정치로비에 능했던 고야는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얻은 지위와 신망을 잃고 싶지 않아 자기 주변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고야는 40대 중반 이후 앓기 시작한 병 때문에 청각을 잃는다. 언제나 그림이 최우선이었지만, 그가 병을 앓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린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재정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죽던 마지막 해까지 돈을 아들 명의 계좌에 넘기는 일을 투자전문가와 의논할 정도로 경제관념이 뛰어난 사람이다.



 ‘폼생폼사’의 렘브란트

 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는 부와 명성을 일찍이 얻었으나 낭비벽 때문에 말년에 고생했다.

 렘브란트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기록이라는 단순함에서 벗어나 초상화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화가다. 그는 네덜란드의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평범한 인생을 살기에 그의 야망은 너무나 컸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있던 렘브란트가 꿈꾼 건 명성이었다.

 램브란트의 재능을 알아본 화상의 주선으로 그림 주문을 받았는데, 당시 유명한 40세의 튈프 교수가 수행하는 해부학 강의를 그려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 작품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다. 렘브란트는 20대 초반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사회적 지위는 좋은 집안 출신인 사스키아와 결혼하면서 이루어졌다. 방앗간집 아들이었던 그가  마침내 고위관리를 처남으로 두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사랑과 부, 그리고 명성을 움켜쥔다.

 “정의로운 사람은 부보다 명예를 소중히 한다.”(1634년 편지)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모델이다. 그녀는 도시의 중간계급으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사치스러웠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지찬금을 믿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무리해서 집을 구입할 정도로 명예를 중요시 여겼다. 한창 잘나가는 화가였기 때문에 주문이 끊이질 않았고,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자신의 수입보다는 집, 옷, 예술품 수집 등 자신의 명성에 맞는 것을 원했다.

 렘브란트의 불타는 예술혼은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느낌으로 모델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익숙한 그의 고객들이 렘브란트를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초상화 주문이 끊어졌다. 하지만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멈추지 못했다. 계속된 낭비 때문에 렘브란트는 파산했고, 채권자들은 빚을 받기 위해 그를 법정에까지 세운다.

 금융시장과 은행과 상거래가 활발한 암스테르담 사회에서 낭비를 일삼는 그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그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렘브란트의 마지막 보루는 사스키아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언에 렘브란트가 재혼을 하면 유산상속 자격이 없다고 명시했다. 렘브란트에게는 사스키아의 유산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꼭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두 번째 아내인 헨드리카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한다. 그녀는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의 착하고 어린 19살 신부였다. 아이의 유모였던 헨드리카의 외모가 사스키아와 많이 닮아서 나이 4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렘브란트는 금방 그녀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렘브란트를 그녀를 작품 모델로 자주 등장시키지만, 사스키아는 장식적으로 그려졌고, 헨드리카는 꾸밈없는 모습이다.

모든 재산을 잃은 말년에 렘브란트는 빵을 사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고, 모델을 구할 수 없어서 자화상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자화상은 렘브란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진 않는다. 절망 속에서도 화가로서 자신만의 색채를 버리지 않고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렘브란트의 그림 성격은 크게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는데, 그것은 재산 상태에 따라 명확하게 나눠진 듯한 느낌을 준다. 부와 명성에 둘러싸인 화려한 생활의 전반기와 가난과 실의에 시달린 후반기에 그린 그림은 각각 성격이 다른 게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