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복과 헬멧, 아이젠으로 무장하고 자일에 매달려 치켜든 아이스툴로 얼음을 내리찍는다. 깨진 얼음 조각은 저 아래로 사라지고 등반자는 온전히 자신의 팔과 다리에 의지해 정상으로 또 한걸음 다가선다. 영하 5℃의 추위는 먼 세상 이야기다. 정상이 눈앞에 보일수록 가슴이 뛴다. 얼음을 깨고 올라설 때마다 느끼는 아찔한 공포와 짜릿한 성취감이 온몸을 휘젓는다.
차가운 얼음에 뜨거운 내 가슴을 싣는다

서울 북한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오투월드 내 실내 빙벽장. 높이 20m 폭 13m로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의 실내 빙벽장’으로 기록된 이곳에서 만난 하이디 제네시스씨(29)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있다. 취미가 산에 오르는 것이고 대학시절 산악부 활동도 했던 캐나다인 하이디씨는 4년 전 한국에 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산(山)사람이었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그가 빙벽 등반을 시작하게 된 건 1년 전인 2006년 초다. 산사람답게 하이디씨는 빙벽 등반을 시작한 이유를 ‘보다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는 “산에 오르다 보니 더 올라가지 못하는 곳이 있어 속상했다”며 “특히 겨울 산의 빙벽은 가장 큰 난관이었다”고 덧붙였다.

빙벽 등반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지만 막상 배울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국의 날씨로는 12월부터 2월까지 단 두 달간만 빙벽 등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알음알음으로 찾아간 빙벽등반학교에서 코스를 끝마쳤지만 중요한 건 실습이었다. 그러다 알게 된 곳이 2005년 말 개장한 실내 빙벽장이다. 사시사철 즐길 수 있는 빙벽은 그에게 ‘신천지’였다.

영하 4℃에 맞춰진 거대한 냉동고 안에서 덜덜 떨고 있던 기자에게 ‘영어에 대한 공포’로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캐나다 여성은 그의 꿈을 한국말로 또박또박 전했다.

“빙벽 등반은 훗날 세계 최고봉에 오르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예요. 최근 바빠져서 자주 찾진 못했지만 올해는 더 자주 올 거예요.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죠”

빙벽 등반은 최소 2명 이상이 한 팀이 돼서 즐겨야 한다. 혹시나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하이디씨와 함께 빙벽 등반을 즐기던 정준교씨(26)는 빙벽 등반의 매력을 한마디로 말했다. ‘스릴’이란다. 최소한의 장비로 자신의 팔과 다리에만 의지해 90도 각도의 빙벽에 오르는 것은 두렵고 힘든 만큼 성취감도 크다는 것이다. 빙벽 등반의 스릴에 매료된 정씨는 어느덧 한 달에 15~20일을 이곳에서 보내는 마니아가 됐다.

빙벽 등반의 기원은 알프스다. 양치기들이 쇠꼬챙이가 달린 지팡이와 미끄럼 방지용 징이 박힌 신발을 이용해 가파른 알프스산맥을 넘어다닌 데서 유래했다. 양치기의 지팡이와 신발이 오늘날 아이스툴과 아이젠으로 발전하면서 빙벽 등반이 가능해졌다. 특히 앞발톱 두 개를 추가한 12발톱 아이젠과 수직 빙벽에 매달릴 수 있는 프런트 포인팅 기술이 등장하면서 빙벽 등반의 대중화가 이뤄졌다.

현재 국내엔 50여 곳의 자연, 인공 빙벽장이 있으며 4000여 명의 동호인이 빙벽 등반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에 비해 빙벽장이 부족하고 즐길 수 있는 기간이 짧아 휴일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게다가 안전 문제로 많은 사람이 오를 수 없어 순서를 기다리다보면 날이 저문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는 동호인 수가 늘어나는 데 큰 제약일뿐더러, 많은 경험을 할 수 없어 동호인들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제약이 된다.

박준규 오투월드 강사는 “실내 빙벽은 20시간 정도만 기초 자세와 장비 사용법을 익히면 누구나 정상 정복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며 “실내 빙벽장이 빙벽 등반 동호인들의 수를 늘리고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문의 : 02)990-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