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身體)와 발부(髮膚)는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초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嘲笑)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서울은 이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할 것으로 승전(承傳)을 받들라. (선조 5년 9월28일(辛亥).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 하는 풍조를 금하도록 하다.)

備忘記傳于政院曰: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我國大小男兒, 必貫穿其耳, 作環珥而懸之, 取譏於中國, 亦可羞愧. 自今後, 一切痛革胡習, 曉諭中外. 京中則限今月, 其或憚不卽從者, 憲府嚴加懲罪, 以此捧承傳可也.

1572년 9월 선조는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 하는 것을 금하라는 규제를 내렸다. 430여 년 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도포자락을 날리며 금귀고리를 하고 광화문 앞을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사실 이 당시의 귀고리 금지는 풍기문란이나 기타 사회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라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이루어진 규제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세종 때의 기록에도 사대부가 자제들의 귀고리를 비롯하여 갖가지 장신구를 만드는 재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사대부 남녀의 귀고리 착용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같은 책에도 역시 귀고리 착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선조의 규제 이후 남자의 이식(耳飾)은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여자들도 고리가 아닌 걸이의 형태가 자연히 일반화되었지만 불편해서인지 평상시에 이식하는 습속은 사라지고, 혼례 등 의식 때(사진1. 칠보장식과 홍색견사가 잘 아우러진 의례용 귀걸이)만 사용하게 되었다. 유물에서 보면 귓바퀴에 거는 큰 걸이 밑에 붉은색 술이 달려 있기는 하나(사진2, 3. 귓바퀴에 걸어서 착용하거나 실을 끼워서 걸어서 착용한다.) 그 형태가 고대 유물에서와 같이 다양하지 못하고 대부분 단조롭다. 이 단조로움을 보완하기 위하여 장식물 밑에 오색의 술을 달기도 하였다.

피어싱(piercing)은 말 그대로 뚫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는 것도 넓게 보면 피어싱이라 할 수 있다. 피어싱은 귀 뿐만 아니라 코, 입술, 혀, 배꼽 등 신체의 특정 부위를 뚫거나 고치는 등의 모든 몸치장을 말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현재 개성과 미적 요인 등으로 표현되는 피어싱은 고대 문명인 잉카, 아즈텍 그리고 마야 등의 원시사회와 그 외 아시아나 지중해 주변, 아프리카 등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신분의 상징, 주술적 의미, 힘의 과시를 표현하기 위해 착용했던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피어싱, 즉 귀고리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체를 장식하기 위해 아름다운 옷과 모자, 신발에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 완륜 등의 다양한 장신구(사진4, 5. 목걸이, 팔찌, 반지)를 곁들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토털패션을 완성하였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귀고리는 고리가 가는형(細耳飾)과 굵은형(太耳飾)(사진6. 삼국시대의 다양한 귀고리)이 있는데, 그 제작 기술 기법이 요즘 금·은세공 기술과는 비교가 안 된다. 경주시 보문동 부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귀고리(사진7)는 태환과 타원형 중간 고리에 꽃과 기하문을 매우 정교하게 장식한 놀라운 세공기술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귀고리(사진8, 9)는 세환식 귀고리에 두 가닥으로 나누어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하트모양 장식을 달았고, 다른 하나는 작은 잎사귀 장식이 달려있어 매우 화려하다.

이러한 귀고리 풍습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고, 선조 이후 여성들의 경우에도 점차 귀고리를 착용하는 비율이 줄어든 것 같다. 귀를 뚫어서 끼우는 방식에서 벗어나 귓바퀴 모양의 고리를 만들거나 고리에 실을 매달아 귓바퀴에 거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사진(사진10, 11. 귀를 뚫는 형식의 커다란 링귀고리는 100년 전에 유행했던 귀고리)에는 여전히 귀를 뚫는 귀고리도 보인다. 1940년대 평양지방의 혼례사진을 보면 신부와 들러리가 머리에 화려한 꽃장식을 하고 커다란 귀고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재미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에 비해 훨씬 더 장식의 욕구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그것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오지 사람들을 보면 남자들도 바디페인팅을 하고 목걸이, 귀고리에 깃털 장식까지 훨씬 더 화려하고 다양하게 장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물이나 새도 암컷보다는 수컷이 훨씬 더 예쁘고 화려한 깃털을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러니 본능적인 면에서 따져본다면 남성들의 장식 욕구도 만만치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역사를 더듬어보니, 남성의 귀고리 풍습은 하루 세 끼 습관적으로 식사를 하듯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