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임금들은 세자 시절부터 현명하고 어진 군주를 이상으로 왕재(王才) 수업을 받았다. 특히 육예(六藝 : 禮·樂·射·御·書·數)의 하나였던 서예는 왕재 수업에서 중요한 과정의 하나였다.

예로부터 서여기인(書如其人), 즉 글씨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준다고 했다. 예술의 한 영역이기도 하지만 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과 인격을 다스리는 예술이라는 의미다. 여기에 깊은 학문적 바탕도 갖춰야 한다. 글씨 연마 뿐 아니라 철학과 시문학에 대한 깊은 소양, 옛 서예작품에 대한 감상 능력과 더불어 분석 능력 그리고 조형적 표현력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서예의 특성 때문이다. 조선의 임금 중에 서예에 탁월했던 분들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조선 왕실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선대왕의 필적을 계승하려는 경향, 즉 어필 숭앙의 전통이 반영돼 있다. 또 조선시대 당시의 글씨풍의 선호도와 경향을 동시에 보여주는 기준이 되고 있다.

우선 왕실에서 일정하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애호했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였다. 서예가 예술로 빛을 발하게 했던 대 서예가 왕희지의 글씨는 왕실 뿐 아니라 조선 전체에, 그리고 중국에 있어서도 서예의 이상(理想)이 되었던 글씨였다.

실제 조선 왕실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고 임금 글씨에서 그 경향이 두드러진 글씨는 조맹부의 송설체였다. 송설체는 아름다운 형태와 우아한 미를 지닌 글씨로, 조맹부가 역대 서예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글씨에서 왕희지의 글씨를 비롯한 옛 법을 반영해 창조한 것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던 송설체의 명필은 세종의 왕자들로 대표될 수 있다. 문종과 세조, 그리고 안평대군이 그들이다. 문종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치로 명성이 높았으며 세조는 근엄하고 힘찬 필치의 글씨를 전해주고 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최고의 명필이었다.

또 성종은 안평대군의 글씨와 매우 비슷해 높은 감식안(鑑識眼)을 가졌던 이들도 두 분의 글씨를 구분해 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송설체를 바탕으로 한 조선 전기 어필은 부드러운 필치로, 때로는 강한 면모를 보이면서 각 임금들의 개성을 담아 조선 중기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선조에 이르러 송설체의 곱상한 아름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시작됐다. 변화의 첫 번째 결실은 석봉 한호라는 서예가의 출현이었다. 한호를 발탁한 선조는 석봉체로 씌어진 <해서천자문>을 제작, 전국 서당에 보급함으로써 새로운 범국가적 글씨체를 공표했다. 석봉체의 특징은 근엄하면서도 단정하고, 무엇보다 강한 필력에 있다. 또 굵은 필획은 살이 아닌 근육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는 굵고 강한 필획에 빠른 필치로써 속도감을 강조하는 선조의 글씨와 많은 면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박성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시기 서예미의 기준은 ‘강함’이었을 것”이라며 “임금의 권위가 한 시대의 문화를 이끄는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선조를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선조의 서풍(書風)은 후대 임금 및 왕실의 글씨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조는 선조와 비슷한 어필을 남겼으며 효종은 선조의 서풍을 계승해 한층 강하고 날카로운 필치를 전하고 있다. 현종은 효종의 글씨와 비슷한데 특히 가로 획의 마침 부분을 강하게 마무리 짓는 붓놀림 등은 매우 흡사하다.

이 당시 임금들의 글씨 경향은 17세기의 조선 서예의 경향과 유사하다. 효종 및 현종의 글씨는 석봉체를 바탕으로 굳건한 필치의 글씨 풍을 이룬 송시열, 송준길의 글씨체인 양송체와 비교해 볼만하다.

그러나 숙종에 이르러서는 또 다른 변화를 보이는데 바로 윗대인 효종, 현종의 글씨처럼 다소 납작하고 다부진 인상의 글꼴을 닮고 있지만 필치에서는 달라진 것이다. 표현의 차이는 모서리 획의 처리에 있었다. 숙종의 선대 임금들은 꺾는 부분이 각이 지게(折) 썼던 데 비해 숙종은 모서리를 유연하게 돌려 꺾어(轉) 썼다. 이 필획 처리의 특징은 송설체 형성에 있어 목표가 되었던 왕희지의 서예, 특히 해서의 특징이기도 하다. 영조의 글씨에서는 이 같은 특징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조는 숙종이 구사한 송설체보다 더 유연하면서도 필획의 변화가 큰 화려한 조선풍 송설체를 구사했다.

박 학예연구사는 “변화를 이끌어 냈던 선조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역대 임금들이 쓰던 글씨 풍이 잔존, 계승한 것으로 해석된다”며 “선조 임금 이전의 선대 임금의 글씨로 회귀하려는 왕실 서예의 복고 태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조선 왕실은 5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조선 서예사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일정하게 반영하기도 했지만 왕실 서예의 서풍은 선대왕의 서풍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유지하는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 임금들의 글씨는 후대 임금에 의해 돌, 나무 등에 새겨져 전해져 오고 있다. 특히 필획 느낌을 최대한 섬세하게 살리기 위해 많은 글씨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이를 ‘석각필적(石刻筆蹟)’이라 부르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59점이 보관돼 있다. 오는 12월1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들 어필석각을 비롯해 조선 임금들의 서예를 감상할 수 있다.

문종 어필 ‘칠언절구’

좌 가로22.6×세로29.2㎝, 우 가로22.9×세로29.4㎝/행초서/탑본(榻本)/15세기

문종은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송설체가 바탕을 이루었는데 필치가 섬세하고 깔끔하며 매우 유려한 느낌의 필획으로 썼다. 특히 살이 많이 붙지 않은 필획을 쓰면서도 날이 선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문종 글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선조 어필 <적선>

가로86.4×세로196.5㎝/판각탑본/16세기

이 글씨는 필획이 굵고 당당한 큰 글씨의 해서체다. 선조는 글씨를 매우 잘 썼지만 특히 큰 글씨를 자신감 넘치게 잘 썼던 것 같다. 이는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딸 정명공주의 글씨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효종 어필 ‘당시(唐詩)’

가로52.8×세로124㎝/17세기 후반

효종은 선조의 서풍을 계승해 한층 강한 필치의 글씨로 표현했다. 획 굵기에 변화를 준 날카로움과 가로획의 마무리를 강하게 하는 것은 효종과 현종 글씨의 특징이다. 이 글씨는 잠삼(岑參)의 시 등 4개의 시를 함께 쓴 것이다. 이 작품은 원 글씨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잘 살린 모본(慕本)이다.

현종 어필 <명선공주 묘표>

좌 가로22.7×세로24.4㎝, 우 가로22.5×세로26㎝/탑본(榻本)/1673년

현종 14년 천연두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딸 명선공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강한 필치로 표현한 글씨다. 비후한 느낌이 강한 필획으로 썼다.

숙종 어필 <숙명공주에게 주는 글>

가로22.5×세로29.3㎝/탑본(榻本)/1699년

숙종의 이 글씨에서는 효종과 현종 두 임금의 아취를 느낄 수 있지만 필획에서는 모서리 획을 전(轉)으로 쓰는 등 변화가 보인다.

정조 어필 <문상정사에 제함>

가로63×세로44.2㎝/1798년

흘림 기운이 가득한 해서로 두툼한 필치가 인상적이다. 특히 이 글씨는 정조 글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은거하는 신하에게 주는 칠언시로 신하에 대한 임금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순조 어필 <구오복 팔천세>

가로88.2×세로201.8㎝/1795년

순조 여섯 살 때의 글씨다. 천진함이 가득한 필치지만, 큰 붓으로 시원하게 쓴 대담한 필획은 어떤 명필과 겨루어도 결코 기울지 않는다. ‘九五福 八千歲’는 <장자>와 <서경>에 나오는 구절로 복을 누리며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위쪽에는 윤행임의 소감이 씌어 있는데, 당시 원자(元子 : 순조)가 숙직하고 있던 자신에게 이 글을 써서 주니 영원한 보배로 삼겠다는 내용이다. 아래쪽에는 1837년에 쓴 신위(1769~1847)의 소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