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불기 시작한 미니스커트와 레깅스의 유행이 겨울까지 이어지면서 부츠가 더욱 각광받을 것으로 보인다. 올 가을·겨울 시즌 부츠는 다리에 달라붙지 않고 여유 있는 통부츠 스타일의 튜블러(tubular)가 대세다. 남성적인 스타일의 시가렛 팬츠와 블랙 재킷에는 발등이 드러나는 부티가 어울린다.”

계절이 바뀌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사는 다음 시즌에 유행할 스타일과 칼라에 관한 내용이다. 올 여름 유럽이나 미국에서 열린 패션쇼에 등장한 칼라를 눈여겨보면 블랙이 단연 우세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나 할까? 대학 4년(1987년) 때 미국의 어느 영화배우가 유행시킨 블랙은 사계절 구두를 블랙으로 바꾸어 놓았고, 여성들의 체형을 커버해 준다는 이유만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블랙이 유행했다. 2006년 겨울 20년만에 컴백한 드레스 코드, 블랙은 분명 예전과는 다른 변화된 블랙 이미지라고나 할까?

그럼 400년 전 조선시대 관리들의 드레스 코드는 무엇이었을까? 홍색? 남색? 녹색? 관리라고 하면 사극에서 검정색 모자와 동물 그림이 수놓아진 네모난 장식 판이 달린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이 사각형의 자수 장식은 흉배(胸背)라고 하고, 왕의 옷에 달려 있는 둥근 용무늬 장식 판은 보(補)(그림1, 왕의 보, 용문을 금사로 수놓아 장식함)라고 부른다. 보나 흉배가 붙어 있는 옷은 왕과 관리들이 국가의 중요한 일 등 공적인 일을 볼 때 입는 유니폼과 같은 것으로 단령(團領)이라고 한다. 단령은 옷의 깃이 둥글다 해 생긴 이름으로 진덕여왕 2년(648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받아온 것이 처음이며 그 이후 고려·조선시대까지 관리의 옷으로 약 1350년 동안 입혀진 역사가 오래된 옷이다. 그림이나 벽화(그림2, 단령을 입은 하급 관리, 박익묘 벽화, 고려시대), 초상화(그림2-1, 단령을 입은 무관 민관승, 1800년대)에 등장하는 깃이 둥근 옷은 모두 관리 옷이라고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요즘 군복이나 경찰복에 계급이 표시되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관리복에도 품계에 따른 다양한 표시가 있었다. 즉 멀리 걸어오는 관리의 옷 색깔, 흉배 장식, 각대의 재료 등만 보아도 품계가 몇 품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조선 전기 단령의 색은 정1품에서 정3품까지는 홍색, 종3품에서 6품까지는 청색, 7품에서 9품까지는 녹색 등으로 품계에 따라 정해진 색이 있었다. 또 등과 가슴에 부착한 흉배는 문관과 무관을 구별하여 하늘을 나는 새와 땅에 있는 동물을 수놓아 장식하였다. 흉배에는 공작, 운학, 백한, 호표, 호랑이, 해치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동물(그림3, 대사헌이 달았던 해치흉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이 등장하다가, 조선 말기에는 문관 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로 정하게 되었다(그림4, 문관 당하관이 달았던 단학흉배) (그림5, 무관 당상관이 달았던 쌍호흉배). 이외에도 단령에 차는 허리띠인 각대(角帶 : 그림6, 1품관이 찼던 서각대)까지도 서대(犀帶), 소은대(素銀帶), 흑각대(黑角帶) 등으로 신분에 따라 재료를 달리 사용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정해진 법이 있는데도 잘 지켜지지 않아 여러 번 새로 법을 제정하고, 금지하는 일이 빈번하게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높아지고 싶은 마음은 같은가 보다.

이외에도 국가의 큰 행사, 설날, 동지, 조칙을 반포할 때 입는 옷을 조복(朝服 : 그림7)이라 하며 관리복 중 가장 큰 옷이었다. 머리에 금관을 쓴다 하여 금관조복이라고도 불렀다. 이 금관(그림8, 5량관, 금관이라고도 한다)에는 줄이 5개 있는데 이를 양관이라고도 하며 1품은 줄이 5개, 2품은 4개, 이런 식으로 하여 7품에서 9품은 줄을 1개를 장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금관 유물은 거의 대부분이 5량관이고 1량관 유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제복(祭服 : 그림9)인데 이는 국가의 제사가 있을 때 제사를 집례하는 제관과 헌관이 입는 옷으로 머리에는 흑색 제관을 쓰고, 겉에는 검정색 포를 입으며, 패옥(그림10, 조복이나 제복의 양 옆에 차는 패옥)과 후수(그림11, 조복이나 제복의 뒤에 늘어뜨리는 후수), 대대 등을 장식하며 이에 맞는 흑색 신발(흑혜 : 그림12)도 갖추어 신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복 일습을 갖추게 된다. 

즉, 입궁할 때는 그에 맞는 옷을 갖추어 입어야 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제사가 있는데 단령을 입을 수 없었고,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조복을 입어야만 했던 것처럼 때와 장소에 따른 다양한 드레스 코드가 있었다.

그러나 왕이나 관리도 집안에 있을 때, 공적인 일이 아닐 때는 자유로운 차림을 할 수 있었으니, 이때만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왕도 평소에는 백저포(白苧袍)를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도 평상시에는 일반인과 같이 모시로 만든 포(그림13, 모시로 만든 포, 재현품)를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003년 4월29일 유시민 의원이 정장 대신 깃이 없는 티셔츠와 면바지에 캐주얼 재킷을 입고 등원해 의원 선서를 하려다가 다른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선서를 미룬 일이 있다.

조선시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 드레스 코드를 갖추었어야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