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관광대국이자 문화 국가인 프랑스. 이 부드러운 이미지는 이 나라가 세계 3위의 핵 강국이자 군사 국가, 그리고 첨단 항공우주산업 국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만든다. 파리지앵의 삶을 통해 보는 프랑스의 속살들….
  분주한 파리의 지하철. 출퇴근 때가 아니어도 파리지앵들의 발걸음은 늘 종종걸음이다. 시간이 아깝다는 듯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들은 백인, 흑인, 아랍인, 동양인 등 여러 인종으로 구성돼 있지만, 이들의 사회생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예약 문화와 서류 천국

 첫 번째는 모든 작업 과정을 서류로 만들어 보관하는 것. 구두 계약에 비해 정확한 일 처리와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해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문제는 가히 ‘서류 천국’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심하다는 점이다. 기업 및 공공기관 관련 서류는 물론 각종 은행 명세서, 병원, 슈퍼마켓 배달에 이르기까지 편지나 팩스 등을 통한 서류화 작업 없이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 한번은 텔레비전 방송에서 각 가정에서 책장이 넘쳐날 정도로 많은 서류 때문에 골치를 앓는 내용이 방영됐던 적도 있다.

 두 번째로는 철저한 예약 문화를 들 수 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간의 스케줄을 미리 짜놓는 파리지앵의 습관은 예측 가능한 경제활동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제도라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단점이 만만치 않게 지적되고 있다. 급한 통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어디가 아프신가요?’라는 질문 대신 ‘예약하셨나요?’라는 질문부터 받아야 할 정도니 불평이 나올 만도 하다. 은행과 카센터의 경우, 계좌를 새로 열거나 차가 망가졌을 때에도 예약부터 해야 한다. 최근 유럽연합(EU)의 시장 개방으로 인한 경쟁으로 몇몇 기업에서는 변화를 꾀하며 ‘예약 없이 계좌를 열 수 있습니다’라거나 ‘약속 없이 차를 고치러 오세요’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문구를 카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때때로 외국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프랑스의 예약 문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프랑스 기업이나 단체를 방문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회의나 미팅에 대비해 오래 전부터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거나 관련자들이 스케줄을 조정하기 때문에 예약 없이는 미팅조차 힘들다. 파리에 왔으면 파리의 법을 따라야 한다. 파리지앵과 업무를 논할 때는 처음부터 서류화하고 미리 약속을 잡는 것이 필수다.

 서류와 예약 문화 때문에 빡빡해 보일 수 있지만, 파리지앵들의 일상생활은 여유로 가득하다. 그 중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세계 최장의 유급 휴가와 주5일, 주35시간 근무제다. 한 달 동안의 여름휴가가 가능한 파리지앵들은 봄부터 휴가 장소를 물색하고, 긴 여름휴가를 마친 뒤에는 연5주의 유급 휴가 중 나머지 한 주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한다.  파리지앵은 일상 또한 여유롭다. 회식 문화나 연장 근무가 드문 파리지앵들은 퇴근 후 시간을 가정에 할애한다.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보통이고 주말에도 밤늦도록 이어지는 술자리보다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외출이 대부분이다. 주중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별식을 만들고, 아기를 안고 산책하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온 남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남녀평등 사상과 맞벌이 부부들이 대다수라는 현실에서 비롯된 결과다.



 파리지앵들의 호주머니 속사정

 주말마다 파리지앵들은 하우스파티를 즐긴다. 이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과 보통 3시간 이상씩 이어지는 저녁식사 시간을 여유 있게 즐기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우스파티가 잦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비싼 파리의 물가가 그 원인이다. 식사 모임 때마다 대규모의 인원이 좋은 레스토랑에서 모이기란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리의 비싼 물가 때문에 독특한 풍경도 생겨났다. 직장과 집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직장인들은 점심 때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는 것. 점심 한 끼가 최소 1만5천원이라는 게 평균 연봉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파리지앵들에겐 부담스러운 액수다.

 ‘한턱 문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파리의 독특한 풍경이다. 미리 ‘내가 사겠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한, 모임은 원칙적으로 더치페이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식사가 끝나면 웨이터가 가져온 영수증에서 자신이 먹은 것만 골라 합산한 뒤 순서대로 각자의 카드로 계산한다. 우리나라 인정으로는 야박하게 보일 수 있지만 파리에서는 계산하는 손님도, 받는 웨이터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파리지앵들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아이템이 생겼다. 바로 바이오 식품(Produit Bio)이다.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채소, 과일, 고기부터 초콜릿, 과자, 햄버거 스테이크, 요구르트, 스파게티 등의 가공식품까지 다양한 종류의 바이오 제품이 팔린다. 바이오 식품이 일반 식품보다 훨씬 비싸지만 소비자들의 관심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바이오 식품과 함께 인기를 끄는 분야는 극동아시아 문화다. 몇 년 전만 해도 남미 문화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젠(Zen)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아시아 상품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 스트레스 해소와 심신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소개되는 이 제품들은 음식 및 가구, 풍수 및 요가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파리는 구대륙의 중심지이지만 내부에서는 오랜 전통을 존중하는 한편 그 단점을 보완하고 이국적인 문화 흡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늘 끊임없는 변화를 모색하는 국제도시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