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대부분은 그림을 그리는 일로 채워진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조차도 내 눈과 마음은 늘 그리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풍경은 내 그림의 소재가 된다. 그림 그리는 일 말고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은 걷는 것이다. 요즘 무슨 자동차 광고 카피처럼 정말 지구는 산책하기 좋은 별이다.

 북한산이 온 동네를 뺑 둘러싼 풍광 좋은 우리 동네를 매일 한 시간씩 걷는 일 말고도 시내에 나갈 때마다 웬만한 곳은 대충 걸어 다닌다.  

 걸어 다니면서 세상 구경을 하는 일이 곧 내 그림의 시작이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일상의 모습을 속속들이 내 마음의 카메라로 사진 찍는다.

 일상은 누구에게나 지루하고 별 볼일 없다. 출근을 하고 빨래를 하고 운전을 하고 술을 마시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지루한 일상,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것만 같은 우리들의 삶, 하지만 그 사소한 일상들 사이로 사랑과 여행과 놀이와 탄생과 죽음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자리 매김한다. 오늘도 나는 일상을 수집하러 길을 나선다. 영화를 보는 일은 그 똑같은 일상에서의 작은 축제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의 장면들을 그대로 닮은 우리들 삶의 일상과 축제를 동시에 그려내는 일은 내게는 즐거운 노동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그림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구경꾼의 일기 같은 것이다. 그림 속 하나의 원은 고층 건물 속 하나의 방이기도 하고, 한 사람의 마음의 방이기도 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의 동그란 렌즈이기도 하다.

 내게 세상의 풍경들은 안경알이나 카메라 렌즈 속처럼 동그란 원이거나 사각형으로 보인다. 나는 마치 거리에서 행인들의 스냅사진을 찍는 사진사처럼 오늘도 거리를 서성인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들은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묘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지닌다. 마치 꿈속의 풍경 같다.

 하긴 꿈과 삶이 뭐가 다르랴?

 지나가는 모든 순간은 꿈처럼 덧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듯한 똑같은 일상들은 기억나지 않는 꿈속의 장면들을 닮아 있다. 나는 그 꿈을 찍는 사진사가 되고 싶다. 마치 이게 우리들의 지루하고 행복하고 슬프고 덧없고 아름다운 삶이었다는 증거라도 남기고 싶은 거다. 춤을 추는 여자, 길 떠나는 여자, 포옹하는 남과 여, 전화와 내일과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 통일을 꿈꾸는 사람, 매일 매일의 의미 없는 노동에 지친 당신, 돈밖에 모르는 당신, 가을 하늘에 나부끼는 빨래처럼 흔들리는 마음들. 이렇게 사소한 일상의 흔적들이 모여 나의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교향악이 된다. 하지만 내 그림의 교향악은 소리가 없는 무성 교향악이다. 무언극 속의 주인공들처럼 술렁이는 내 그림 속의 사람들은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을 열심히 그리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