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과 관능미의 상징 여자의 몸에서 가장 많은 주목과 대접을 받는 동시에 가장 혹사당했던 가슴, 그 가슴은 미술사를 거치면서 더 분명하게 되기보다는 더 많은 수수께끼를 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의 가슴, 정확하게 말해 젖가슴은 모성의 상징이다. 거기서 젖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슴은 일차적으로는 사랑하고 보호하고 키워주는 어머니의 것이다. 조바니 세간티니의 「생명의 천사」는 한쪽 가슴을 드러낸 채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신성의 경지에 이른 모성을 느끼게 한다. 아마 가슴을 드러낸 여자의 모습이 이보다 더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려질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여성을 신성의 경지에 올려놓을 수 있는 바로 이 가슴이 여인의 삶을 땅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무리 성스러운 것으로 칭송한다 해도 어머니의 가슴이란 음식을 담고 있는 그릇, 혹은 음식 자체인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이란 이성의 기치를 드높이는 인간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하찮게’ 분류된 동식물의 육신을 채우는 ‘물질’ 아닌가.

 이런 역설은 성모 마리아의 젖가슴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속적인 성관계 없이 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잉태했기에 여성을 폄하하던 기독교인들에게도 신적인 존재로 추앙된 성모 마리아, 그녀의 젖가슴도 자식에게 먹일 하얀 생명수로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가슴을 드러낸 마리아를 그림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14세기경부터인데, 초기에는 작고 경직되어 비물질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기 예수의 양식을 담은 가슴이 너무 육감적이거나 너무 인간적으로 그려져서는 안 될 테니 말이다. 그래도 젖가슴은 젖가슴이다. 그 자체로 충만한 기관이 아니라 용도가 있는, 그것도 다른 존재에게 쓰이기 위한 기관인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를 보라. 어두운 공간을 밝혀주는 두 개의 창 너머로 넓고 푸르게 펼쳐진 하늘이 보이고,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도 몹시 성스럽다. 하지만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그 가슴을 빨고 있는 아기 예수의 생생한 표정만큼은 땅과 더 가까워 보인다.



 성스러움과 관능미의 상징

 성스러운 가슴에서 관능적인 가슴으로의 전환은 예정된 것이었던 양 가속도가 붙었지만, 처음부터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사회적 금기 때문에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가슴을 그리고 싶어도 성모나 여신의 베일을 씌워 노출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푸케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서는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도, 그녀가 성모임을 드러내는 의상이나 주변 정황들도 말 그대로 ‘상앗빛 공’ 같은 젖가슴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일 정도이다. 브론치노의 「비너스와 큐피드, 시간과 어리석음의 우화」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비너스와 큐피드라니 분명 엄마와 아들일 터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모자관계에서 보일 수 있는 종류를 넘어선 것 같다. 그림 속의 큐피드는 성숙한 연인이기에는 너무 어리지만, 그렇다고 젖을 빨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은근히 관능적인 몸짓을 취하는 소년이 비너스의 가슴을 만지는 손길은 엄마의 가슴을 찾는 아이를 빙자해서 ‘입으로 먹는 가슴’에서 ‘손으로 애무하는 가슴’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제껏 ‘여자의 가슴’, ‘아름다운 가슴’이란 말을 했지만 실제로 그 가슴들은 제각기 다르게 생겼다. 큰 가슴도 있고 작은 가슴도 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 둥근 젖가슴도 있고 삼각뿔처럼 생긴 가슴도 있다. 전자가 관대한 미소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절제된 단아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어떤 모양의 젖가슴이든 그 끝만은 뾰족하기 마련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가슴의 끝이 두드러질 정도로 뾰족하게 일어선 것은 그 소유자의 정신적, 성적 흥분을 지시할 뿐이다. 하지만 보는 이는 거기서 마치 화살이나 창의 뾰족한 끝 앞에서처럼 공격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연상시키는 펑퍼짐한 엉덩이와 비교할 때,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을 향해 혹은 앞을 향해 솟아 있는 가슴의 기상은 얼마나 기운찬가.

 19세기 남성 예술가들의 애증 세례를 한몸에 받았던 팜므 파탈들의 젖가슴은 무지막지하게 크거나 젖가슴이 기이할 정도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등 몹시 비정상적이고 위협적으로 묘사되었다. 모사의 「그녀」는 지극히 육감적인 몸매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피가 흐르는 시체들의 산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다. 그 앞에서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전율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녀의 눈이 정면에 있는 희생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진을 빼고 있다는 느낌이라면, 바깥쪽을 향하고 있는 젖꼭지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희번덕거리는 괴물의 무자비하고도 매혹적인 눈 같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관능적인 가슴으로의 전환이 예정된 것이었듯, 여성이 자기 몸의 일부인 가슴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일 역시 예정된 일이었다. 그 싹은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과 관계하여 얻은 아들 헤라클레스에게 영생을 주고 싶었던 제우스가 잠든 아내 헤라의 젖을 몰래 훔쳐 먹게 하다 여신이 깨어나는 광경이다. 여신은 황급히 젖가슴을 빼내지만 이미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젖 줄기는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가 되었고 땅에 떨어져 백합꽃이 되었다. 헤라클레스도 영생을 얻었다. 별과 꽃과 영원한 삶, 여신의 가슴이 만들어내는 것들이니 그토록 아름답고 귀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여신의 표정과 몸짓을 보라. 싫다고 하지 않는가. 하늘 위에서 빛나기만 하는 별이 되는 것도, 아무리 아름다워도 시들 수밖에 없는 꽃도, 그리고 자기 몸의 일부에 대해 아이와 남자가 주인을 자처한다는 사실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