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세유 행진곡’ 악보. 발바스트르는 이 작품을 오르간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사진 위키미디어
‘마르세유 행진곡’ 악보. 발바스트르는 이 작품을 오르간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사진 위키미디어
클로드 발바스트르의 ‘로망스’. 안종도 연주. KBS
클로드 발바스트르의 ‘로망스’. 안종도 연주. KBS

출근이 한창인 이른 오전, 지하철 플랫폼에 수많은 발걸음이 몰린다. 쉼 없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을 비웃듯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사회적 거리를 지키기는커녕 저 앞에 오는 지하철을 탈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지하철 바퀴가 철로와 부딪히는 소음, 북적이는 인파에 머리가 혼란스럽다. 곧바로 조용히 이어폰을 꺼내 귀에 가져간다. 이윽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어느새 심장 박동 수는 제자리를 찾아간다. 잠시 후 눈앞에 수많은 인파는 사라졌고 지하철 바퀴의 소음 또한 들리지 않는다. 내 주위에는 고즈넉한 전원 풍경이 펼쳐져 있다.

복잡하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언제든 필자를 구출해주는 고마운 친구다. 바로 클로드 발바스트르가 작곡한 ‘로망스’다.

클로드 발바스트르는 음악 전공자에게도 다분히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자 연주가로서 한때 시대를 이끌어 나갈 최고의 음악가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기구한 운명으로 예술을 접어야 했고 어느새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작품 일부는 지금까지 살아남아 당시 프랑스 바로크 시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초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필자와 같은 현대인에게 삶의 위로와 활력을 준다.

클로드 발바스트르는 1724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났다.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에게 어렸을 때부터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의 천재성을 익히 알아본 아버지는 그가 13세 때 클로드 라모에게 음악 지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클로드 라모는 ‘프랑스 바로크 시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장 필립 라모의 동생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본 클로드 라모 또한 자신의 형인 장 필립 라모에게 발바스트르를 추천했다.

발바스트르는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프랑스 파리로 가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장 필립 라모 또한 발바스트르와 같은 디종 출신으로 그를 무척 아끼고 지원하며 베르사유 사교계에 그를 소개했다. 발바스트르의 천재적 재능과 감성, 기품의 조화가 일품인 음악 스타일은 곧바로 당시 음악계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 필립 라모의 뒤를 이어 프랑스 음악계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음악가로 인정을 받게 된다.

발바스트르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그가 파리 생로슈 성당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할 당시 주교가 그의 미사 연주를 금할 때도 있었다. 발바스트르가 연주할 때면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수많은 인파로 성당이 미어터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발바스트르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음악 교사 그리고 루이 18세의 하프시코디스트로 임명됐다. 그의 커리어는 정점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발바스트르는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품을 다수 작곡했다. 그의 선배인 장 필립 라모의 창의적인 표현과 프랑수와 쿠프랑의 시적인 표현이 조화를 이루는 곡이었다. 이후 모차르트가 생각나는 듯한 고전 시대적인 표현을 활용하기도 하고 음악 또한 가볍고 달콤하게 표현한다. 이 또한 당시 베르사유를 대표로 하는 상류 사회의 취향이었으리라.

이러한 감성적인 음악으로 당시 음악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쯤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다. 1789년 프랑스에는 대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도시에는 시민의 봉기가 일어났고 그 분노는 모두 베르사유 궁전에 향해있었다. 시민군에 의해 파리와 베르사유 궁전이 함락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이후 해외로 도피하지 못한 모든 귀족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발바스트르의 삶에도 엄청난 변화를 요구했다. 그가 모시던 귀족들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을 위해 작곡, 창작 및 연주가 금지되었다. 그것을 넘어 귀족 사회의 후원으로 음악 활동을 한 그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그는 결국 혁명 세력에 동조함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에 그는 사뭇 다른 작품을 작곡한다. 그는 혁명가를 편곡해 오르간으로 연주하며 살아나갔다고 한다. 용맹하고 기상을 북돋는 듯한 그의 혁명가 편곡 작품에서는 그전에 베르사유 궁전을 위해 작곡한 고즈넉하고 섬세한 감성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같은 사람의 작품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물론 그가 혁명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치의 성향을 떠나서 한 예술가로서 평생 몰두했던 예술의 취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새로운 음악을 해야만 했던 그의 처지가 어땠을까 생각하면 삶의 아이러니에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는 1799년 대혁명이 마무리될 때쯤 파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이름, 작품 등은 한동안 세상에 잊혔다. 프랑소와 쿠프랑이 자신의 말년에 하프시코드 작품에서 그가 평생 쌓고 다듬은 예술의 경지를 표현했듯 발바스트르가 계속 그의 예술 세계에 전념할 수 있었다면 어떠한 아름다움으로 귀결됐을까 하는 생각도 탄식과 함께 들곤 한다.

아침부터 바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가하기 위해 퇴근 지하철에 오른다. 다시 발바스트르의 ‘로망스’를 듣는다. 음악은 다시금 바쁜 도심에서 필자를 꺼내 전원적인 풍경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로망스’는 아무 대답 없이 평온한 강물처럼 유유히 흐른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클로드 발바스트르 ‘클라브생을 위한 모음곡 제1권’
크리스토프 루세

발바스트르는 1700년도 초중반부터 후반까지 살았기에 바로크 및 고전 시대로 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두루 드러낸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프랑스 고전이 어떻게 전개 됐을지 그의 작풍으로 유추도 가능하다. 프랑스 바로크 전통의 총결산으로서 쿠프랑, 라모의 영향 및 발바스트르 자신의 독창적인 음악 스타일을 제시하며, 그의 풍부한 감성은 현재 바쁘고 감성이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마음의 안식을 줄 훌륭한 곡이라 생각하며 프랑스 바로크 연주의 대가 크리스토프 루세의 연주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