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의 한 장면. 사진 IMDB
영화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의 한 장면. 사진 IMDB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자식과 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절벽 위에 선 어머니에게도, 집어삼킬 듯 곤두박질치는 파도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에게도 꿈이 남아있을까. 부모의 죄를 지게 해선 안 된다, 이 아이에겐 이 아이만의 인생이 있다, 그렇게 믿는 순간, 부모의 삶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된다. 내가 떠나서 아들이 안전해진다면, 내가 사라져서 딸이 행복해진다면, 이 삶을 바치는 데 무엇을 주저할까.

도쿄의 한 서민 아파트에서 죽은 지 한참 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경찰은 모습을 감춘 그 집의 거주자, 70대 노인 코시카와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고 몽타주를 작성한다. 그러나 피해자 미치코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데다 인근 하천에서 목이 졸려 불타 죽은 채 발견된 노숙자가 코시카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경찰은 지방에 살고 있던 미치코가 주말을 이용해 도쿄에 왔다는 것, 중학교 동창 아사이 히로미를 만나려 했다는 것을 알아낸다. 히로미는 니혼바시 부근에 있는 대극장에서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미모의 연극 연출가다. 그녀는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친구를 잠깐 보긴 했지만 죽음의 경위는 모른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녀는 열네 살 때 고향에서 아버지와 야반도주했다. 바람난 어머니가 아버지의 인감으로 거액의 빚을 지고 달아난 탓이었다. 삶의 터전을 모두 빼앗긴 아버지는 그 후 신세를 비관, 투신자살했고 혼자 남겨진 히로미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녀는 가혹한 운명을 딛고 일어나 인생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무엇보다 히로미의 알리바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카가 형사는 몇 년 전, 생면부지의 히로미가 연극단원에게 검도를 가르쳐달라며 찾아온 적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16년 전에 죽은 어머니의 유품에 남겨진 것과 똑같은 메모가 코시카와의 달력에도 남겨져 있는 걸 알고 또 놀란다. 필적 감정 결과, 코시카와가 어머니의 연인이던 와타베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카가의 어머니는 그가 열 살 때 집을 나갔다. 왜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났을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자랐다. 가정에 무심했던 아버지 탓이라고 믿었다. 어머니가 유골이 되어 돌아온 것은 그녀가 가출하고 18년이 지난 뒤였다. 그때 아버지는 카가에게 말했다. “네 엄마는 마지막에 널 보고 싶어 했을 거다. 내가 죽을 때 넌 곁에 오지 마라. 나도 고독사하겠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임종을 앞두고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아들이 병실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것이 아들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죽어갔을 아내에 대한 속죄, 어머니 없이 자란 아들에게 못다 준 사랑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피붙이가 왜 보고 싶지 않았을까. 아들 대신 그의 머리맡을 지켜주던 간호사가 죽음이 무섭지 않은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말했다. “기대돼서 못 견딜 정도야. 저승에서라면 마음껏 녀석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를 미워했으면서도 그를 꼭 닮은 유능한 형사로 성장한 카가였지만, 어머니가 집을 떠나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아들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고 싶었다. 자기 뿌리를 확인하고 싶은 당연하고도 절박한 본능이다. 지방의 한 주점에서 일하며 외롭게 살았던 어머니가 마음을 나누었다는 단 한 사람, 와타베가 그 의문을 풀어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6년이 지나 겨우 정체를 드러낸 그는 살인 용의자 코시카와였다. 와타베도, 코시카와도 아닌 또 다른 이름으로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도 아니었다. 

사건은 풀릴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와타베는 왜 미치코를 죽였을까. 그는 또 누구에게 살해당했을까? 와타베의 달력에는 왜 니혼바시 부근 열두 개의 다리 이름이 각각 적혀 있었을까? 와타베는 카가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고 주점 사장을 시켜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도록 했을까?

카가는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실타래가 자신의 인생과 단단히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는 한발 물러나 사건의 지도를 그려본다. 카가와 집을 떠난 어머니, 어머니의 연인 와타베, 와타베와 그의 손에 죽은 미치코, 미치코와 친구 히로미, 그리고 히로미가 만나러 온 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를 따라 돌고 돌아 멈춘 자리엔 카가 자신이 있었다. 그는 깨닫는다. ‘거짓은 진실의 그림자,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카가는 마침내 거짓의 베일을 걷고 사건의 핵심에 이른다. 

‘한자와 나오키’ ‘화려한 일족’과 같은 일본의 유명 TV 드라마를 연출한 후쿠자와 카츠오 감독이 만든 영화다.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외 여러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사랑받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잠자는 숲’ ‘붉은 손가락’ 등 카가 형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시리즈의 완결편이기도 하다. 

시청률의 여왕이라 불리는 마쓰시마 나나코가 히로미를, 드라마 ‘신참자’와 영화 ‘기린의 날개’에 이어 아베 히로시가 카가를 맡았다. 

가족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1년에 겨우 한두 번을 만나더라도 혈연과 결혼, 입양을 통해 맺어진 부부 또는 부자 관계를 가족이라 한다. 하지만 이제는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을 공유하는 동거인을 뜻하는 말로 변형되고 있다. 그런 유사 가족을 권장하는 시대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가족의 의미가 해체된다고 해도, 부모는 자식의 뿌리이고 자식은 부모의 열매다. 자식을 해쳐서라도 눈앞의 욕정에 몸을 던진 히로미의 어머니 같은 철부지 모성도 있지만, 아들을 위해 그리움을 이 악물고 참고 살았던 카가의 어머니 같은 모정도 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는 카가의 아버지, 자기 인생을 희생해서라도 딸의 행복을 지킨 히로미의 아버지 같은 부성도 존재한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 있다고 한들, 혈연만이 줄 수 있는 애끓는 사랑과 희생을 감히 어떤 타인이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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