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라이브 에이드 페스티벌. 사진 IMDb
1985년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라이브 에이드 페스티벌. 사진 IMDb

지난해 미국 사회를 강타한 흑인 인권운동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에서 눈에 띄는 일이 있었다. K팝 팬, 특히 ‘아미’로 통칭되는 방탄소년단의 팬들이 온라인상에서 K팝 콘텐츠를 자신들의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불법 시위자를 제보받는다는 경찰 당국의 페이지에 단체로 K팝 뮤직비디오를 업로드하는 식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청년층의 하위문화였던 북미에서의 K팝이 ‘연대(連帶)’를 위한 무기로 활용되는 순간이었다.

대중음악의 출발은 언제일까.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이후 음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향유할 수 있었던 음악은 레코딩 기술 및 음반의 발명과 함께 시공간에서 자유로워졌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같은 음악을 들으며 향유할 수 있게 됐다. 클래식의 시대와 대중음악의 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이었다.

일부 특권층의 문화에서 평등한 문화가 된 음악이 처음부터 사회와 함께했던 건 아니다. 1960년대 뉴욕을 강타했던 청년들의 저항 운동에 포크는 주요한 코드였다.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아버지’였던 피트 시거를 시작으로 존 바에즈 그리고 밥 딜런이 사회의 모순을 담아낸 노래를 했다. 그들의 음악은 시위대의 행렬에서 지금의 민중가요처럼 쓰였다. 그들 또한 시위대와 함께했다. 음악이 연대의 무기이자, 음악가가 연대의 중심에 서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무브먼트’의 색이 짙었던 음악을 통한 연대는 1969년 여름, 축제로 승화했다. 그해 8월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계기였다. ‘러브 앤드 피스’를 슬로건으로 걸고 개최된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큰 음악 축제이자, 히피와 플라워 무브먼트로 대표되던 당대의 정신이 음악이라는 깃발 아래 모이는 장이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음악가들은 말이 아니라 음악으로 연대했고 이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왔다. 사람들을 연대시켰고, 음악가들이 연대해서 더 큰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 신디 로퍼,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 당대의 팝 스타들이 모여 만든 ‘We Are The World’,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하이라이트로 우리에게 더 유명해진, 1985년 런던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 페스티벌은 음악인들이 연대했을 때 세계에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이벤트에 다름없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봄, 온 세상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지고 이 세대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움직인 건 음악인들이었다. 지난해 4월 온라인으로 열린 ‘원 월드: 투게더 앳 홈’ 콘서트는 갑작스러운 절망과 공포에 쏘아 올린 희망의 등불이었다. 롤링 스톤즈,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레이디 가가, 엘튼 존, 샘 스미스, 존 레전드 등 100팀이 넘는 초호화 라인업으로 꾸려졌다. 세대와 장르, 국적을 총망라한 음악인들은 가장 힘든 시대에 가장 큰 힘을 보였다. 막대한 후원금이 모였고 의료진에게 전달됐다. 우리는 코로나19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 행사가 없었다면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초기 절망의 농도는 더욱 짙었을 것이다.


국내 아티스트가 참여한 ‘우리의 무대를 지켜주세요’ 캠페인. 사진 우리의 무대를 지켜주세요
국내 아티스트가 참여한 ‘우리의 무대를 지켜주세요’ 캠페인. 사진 우리의 무대를 지켜주세요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참여한 ‘위 아 더 월드’ 앨범. 사진 위키피디아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참여한 ‘위 아 더 월드’ 앨범. 사진 위키피디아

관객과 아티스트가 연대한 한국 음악계

코로나19 아래에서 음악의 연대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팬데믹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업종은 공연이다. 비대면의 일상화로 인해 스트리밍 시장은 커졌지만 공연 시장은 궤멸했다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라이브 클럽들이 가장 큰 난관에 봉착했다. 일 년 사이 라이브 클럽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클래식과 뮤지컬은 제한적으로나마 열리는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업종은 공연이다. 그중에서도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라이브 클럽들이 연이어 폐업했다. 이대로라면 바이러스의 그늘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무대가 없어진다. 음악의 밭이 황무지가 되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한국 청년문화사의 가장 오랜 시간을 차지해온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이 이런 식으로 위기에 처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뭉쳤다. 연대했다. 3월 8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우리의 무대를 지켜주세요’라는 행사가 열렸다. 디제이디오씨, 다이나믹 듀오부터 잔나비, 잠비나이까지 총 67팀이 롤링홀 등 홍대앞 라이브 클럽 5개 무대에 섰다. 관객들은 클럽 대신 집에서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이 공연을 지켜봤다. 공연 수익은 대관료 형태로 전액 공연장에 지불됐다. 설령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다시 공연이 재개되더라도 정작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사라지고 없으면 소용없다는 위기의식과 연대의 표현이었다. 관객들 역시 이 연대에 힘을 보탰다. 실제 공연에 비하면 열악한 화질과 음질, 무엇보다 현장감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티켓을 구매했다.

그 결과 ‘세이브 아워 스테이지’는 1차 목표 금액을 훌쩍 넘긴 5000만원 이상의 수익을 만들었다. 이는 그저 공연장을 살리는 걸 넘어서, 코로나19 대책에서 소외된 대중음악 공연 산업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모든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세이브 아워 스테이지는 라이브 클럽 정책의 허점을 드러내는 계기도 됐다. 라이브 클럽은 아직 법의 사각지대에 있음을 보여줬다. ‘세이브 아워 스테이지’ 초기에 몇 개의 라이브 클럽에 단속이 떴다. 공연이 취소됐다. 방역 위반이라는 이유였다. 현재의 방역 정책은 일반 음식점에서의 공연 및 무도행위를 금지한다. 1999년 라이브 클럽 합법화 운동으로 일반 음식점에서의 공연은 허가됐지만, 라이브 클럽을 법제화하지 않고 남겨둔 탓에 방역 당국의 단속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인 마포구청 측의 대응도 라이브를 사랑하는 이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한 구청 직원이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만 공연장이지. 일반 음식점으로 등록된 곳에서 공연하는 건 칠순 잔치”라고 말하면서 라이브 클럽에 대한 일선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언제는 풍요로운 시절이 있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라이브 클럽과 이곳을 터전 삼아 음악 활동을 하는 이들의 연대는 끝나지 않았다. 지속적인 연대 그리고 관심은 가장 즐거운 방식으로 결국 우리에게 무대를 돌아오게 만들 것이다. 다시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그날, 무대의 조명이 들어오고 스피커가 켜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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