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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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르케고르는 절망의 고유한 특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절망은 자기가 절망인 줄 모른다. 맞다. 절망의 본질은 모름에 있다. 모르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할 때 우리 머릿속은 비관의 연쇄에 빠진다. 그렇다면 희망은? 희망은 아는 것이다. 

옛말에 아는 게 병이라 했는데, 내 생각에 이 말은 그저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의 대립어로서 알면 고통받는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한 비유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편이다. 병이 난다는 건 알게 됐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병은 비로소 드러난 것이고 드러난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병은 앎이고 앎은 희망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주장해야 할 것이다. 병은 희망이다. 

병든 사람만이 책을 읽는다는 얘기를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책을 읽는 데는 고도의 인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책을 읽지만 모두 다 책을 읽는 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테지만 한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금세 내용이 아니라 글자를 보아 넘기는 상태에 이른다. 그 모든 방해 요소들을 이겨내고 책에 몰입하고 있다면 그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을 쓴 사람의 시간을 알고(자 하며),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알고(자 하며), 그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알고자 하고, 타인을 통해 알고자 하는 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병든 사람만이 자신을 알기 위해 방황한다. 그리고 알아 버렸을 때,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절망적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반복했듯이 알았다는 것은 희망이다. 

‘가장 나쁜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다.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여자고 한 사람은 남자다. 여자는 3년 전에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이후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닐 것 같았으므로 그녀의 하루하루는 삶으로부터도 죽음으로부터도 소외된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실종됐고, 실종된 남편과의 재회는 투신자살했다는 비보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남자. 그는 인민군 장교 출신의 탈북자다. 역시 탈북자인 아내와 한국에서 정착하기 위해 살뜰한 나날을 꾸려가던 어느 날, 아내가 한강에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왜? 도대체 뭐 때문에? 

연인이나 가족의 자살 이후 남겨진 자들은 ‘모름’이라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는 충격, 하나의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세계에 혼자만 버려졌다는 상실. 그러나 이 모든 절망을 하나의 단어로 말하면 모름이라는 암흑일 테다. 

다시 두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알 수 없음의 나락에 빠진 두 사람은 용기를 낸다. 알기로 한 것이다. 진실이 드러날수록 더 고통스러워지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아는 쪽을 선택한다. 그게 무엇이든, 얼마나 끔찍하든. 

이 소설에는 나쁜 일들투성이다. 나쁜 일 위에 더 나쁜 일이 있고 더 나쁜 일 위에 가장 나쁜 일이 있다고 생각할 즈음, 지금까지의 나쁜 일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밀려올 거라는 예고장이 날아든다. 하지만 이 불행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알 수 있다. 가장 나쁜 일은 모르고 사는 동안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건 어둠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임을. 

수많은 감정과 사건의 소용돌이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건 소설에 대한 지나친 무례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가장 나쁜 일’은 모르는 게 절망이고 아는 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건네며 끝난다. 오늘 나는 작가가 만들어 준 이 따뜻한 결말에 위로받는다. 밤은 깊었고 두 사람은 잠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날이 밝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아는 건 희망이니까. 

그럼에도 안다는 건 역시 힘든 일이고, 견뎌야 할 우리를 위해 작가는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삽입해 둔다. 인민군 장교였던 남자와 그의 아내 록혜가 탈북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지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다. 의식은 흐려지고 의지는 흩어지고 낙관은 바닥났을 때, 힘들어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못 하나를 박아요. 마음속에 못 하나만 박아.” 그럼 다시 하나둘 떨어진 것들을, 흩어진 것들도, 나중엔 흐려진 것까지 붙잡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도 나도 마음속에 못 하나를 박자. 그럼 아는 고통 속에서도 아는 희망을 믿을 수 있다. 밤은 깊고 잠은 오지 않지만, 내일이면 날이 밝아온다고 믿어 버릴 수 있다. 안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그냥 믿어 버릴 수 있는 거. 어둠 속에서도 빛을 믿을 수 있는 것.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한국문학평론가협회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김보현

사진 민음사
사진 민음사

2011년 문예지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고니’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올빼미 소년’으로, 2015년 ‘팽: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로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2017년 장편소설 ‘누군가 이름을 부른다면’을 출간했다. 몰입감 넘치는 스토리와 함께 정확하면서도 섬세하고 통찰력 있는 문체를 겸비한 작가다. 현재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과 소설 쓰기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