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운데)와 DG 최고 경영자 클레멘스 트라우트만(오른쪽). 사진 DG
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운데)와 DG 최고 경영자 클레멘스 트라우트만(오른쪽). 사진 DG

1898년 독일에서 창업한 도이체 그라모폰(DG)은 클래식 음반 역사를 대표하는 최고(最古) 레이블이다. 레이블에 쓰인 ‘그라모폰’ 이름은 DG 창업자 에밀 베를리너(1851~1929)가 개발한 원반식 축음기에서 빌렸다. 플레이어에 구동되는 음반 제작, 오케스트라 녹음, 전속 아티스트, SP(1분 78회전), LP(1분 33회전) 개발 모두 DG가 시초이자 선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DG는 최고(最高) 클래식 레이블로 자리매김했다.

1949년 노란색을 표지에 도입했고 1959년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전속 계약해 30년에 걸쳐 약 330여 종의 앨범을 제작했다. 계약 당시 기준으로 이미 거장 반열에 있던 지휘자 카를 뵘, 라파엘 쿠벨릭, 레너드 번스타인 및 걸출한 신인으로 조명받은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계약하면서 DG는 황금기를 걸었다. 기획과 연주 내용, 녹음 품질에서 정통 클래식을 선호하는 소비자와 오랫동안 신뢰를 쌓았다.

1980년대 들어 LP에서 CD로 재생 포맷이 바뀌고, 199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CD 소비가 감소하면서 명문 레이블도 위기를 맞았다. 필립스가 사라졌고 BMG는 소니로, EMI는 워너로 흡수됐다. 지금은 데카·워너·소니가 메이저 레이블의 명맥을 잇지만, 크로스오버를 바라보는 관점이 DG와 다르다. 1990년대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와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가 각각 EMI, 데카에서 크로스오버로 주목받았지만, DG는 요지부동이었다. 2006년 영국 싱어송라이터 스팅이 작곡가 존 다울랜드의 류트 음악을 부른 게 DG식 이종 접합의 최대치였다.

20세기 말 인터넷이 본격 도입되면서 디지털 음원 시장이 태동했지만, 전통적 클래식 레이블들은 파일 다운로드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모두 고전했다. LP 시절부터 이어진 소비자의 음반 소장 관습을, 컴퓨터를 통한 보관(다운로드)과 대여(스트리밍) 개념으로 곧바로 대체하긴 어려웠다. DG는 노년의 충성 고객층이 MP3 파일을 꺼리고 실물 CD를 구매하는 흐름에 의존했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에 뜸을 들이는 수세적 입장은 창사 이래 기술 혁신을 주도하며 트렌드를 선도하던 과거의 DG와 사뭇 달랐다.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 보급이 이뤄지자 음원 다운로드 창구인 ‘DG 콘서트’를 개설했다. 그러나 CD를 모바일에서 듣기 위해 아이튠즈 추출이란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게 과연 프리미엄 브랜드의 디지털 대응이 맞느냐는 정보기술(IT) 매체의 비판이 거셌다. DG의 모회사 유니버설뮤직이 실적 개선의 압박으로 머천다이징(상품화 기획)과 자사 아티스트의 공연 기획으로 눈을 돌리던 시기였다.

2010년대 중반, 디지털 음원 시장이 스트리밍으로 기울자 DG도 본격적으로 디지털 대응에 나섰다. DG가 디지털 전환에 자신을 얻은 계기는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등장이었다. 조성진은 DG와 전속 계약을 하고 콩쿠르 실황 앨범을 실물 CD와 디지털 음원으로 동시 발매했다. 클래식 장르의 스트리밍 이용에 소극적이던 한국 시장의 패턴을 조성진이 단숨에 바꿨다. 조성진을 몰랐지만 그를 알고 싶은 소비자가 스트리밍에 몰렸다. 카라얀 시대의 향수를 실물 음반으로 즐기던 그룹과는 별개의 유입이었다.

도이체 그라모폰을 세계 최정상의 레이블로 이끈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진 Siegfried Lauterwasser
도이체 그라모폰을 세계 최정상의 레이블로 이끈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진 Siegfried Lauterwasser

디지털로 청년 세대 클래식 포섭

그러나 디지털 전환이 앞으로도 회사 재정에 도움 될지 DG는 아직 대외적으로 입장을 내지 않았다. 다만 혁신을 추진하고 고객의 청취 습관에 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DG가 21세기 초반의 방관자 모드에서 벗어난 것이다. 클래식 신보(새 음반) 출시가 단기적으로는 실물 CD 판매에서 이득을 보지만, 수십 년간 스트리밍에 누적되는 수익을 계산하면 전통적 클래식 레이블의 디지털 전환은 필수라는 판단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이어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DG에는 뜻밖의 기회가 됐다. 단순한 오디오 음원 제공자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사업 확장을 이룰 모멘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클래식 음악 시장은 ‘라이브 음악(공연·페스티벌)’과 ‘기록 음악(레코딩)’으로 영역을 나눴다. 공연 흥행 업체와 음반 제작 업체가 서로 상대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각 투어 공연과 앨범 제작으로 이윤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프로모터 재팬아츠가 일본에서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의 리사이틀 투어를 진행하고, DG는 새 음반을 제작하는 식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 오프라인 공연이 멈추자 DG는 지난해 5월 온라인 유료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DG 프리미엄’을 개설했다. 안네 소피 무터, 조성진 등 자사 아티스트를 자원으로 DG는 슬며시 영상과 공연 카테고리에 진출했다. 아직은 영상 제작과 온라인 송출 노하우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보다는 처지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기술을 통해 청년 세대를 클래식으로 끌어들이는 데 회사의 미래를 걸었다. 저명 연주 단체가 유튜브에 무료 고화질 영상을 내놓고 LP 앨범이 부활하는 혼란기에 DG 프리미엄은 ‘모든 형태의 클래식 재생은 DG가 함께한다’는 새로운 가치 사슬을 권유한다. 특히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DG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소프라노 박혜상이 출연하는 온라인 DG 스테이지를 영상 서비스했다. ‘디지털이 클래식 음악을 갱신한다’는 DG의 최고경영자 클레멘스 트라우트만의 미래 전략을 달성하는 데 적합한 새로운 여성 인재가 DG 로스터(소속 아티스트)에 대거 영입됐다.

“음악 청취의 즐거움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산업은 디지털을 매개로 능동적으로 변한다”는 새로운 비전을 전하는 데 한국 신인 예술가들의 음악과 이미지가 쓰인다. 기존 DG 로스터에 속한 고령 남성 연주자들이 심정적으로 디지털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DG 프리미엄 서비스의 지속 여부가 달린 셈이다.

도이체 그라모폰 전속 아티스트,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Christoph Köstlin
도이체 그라모폰 전속 아티스트,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 Christoph Köstlin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 창업자 에밀 베를리너. 사진 DG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 창업자 에밀 베를리너. 사진 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