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라이프치히의 토머스 교회 앞에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동상. 사진 위키미디어
독일 라이프치히의 토머스 교회 앞에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동상. 사진 위키미디어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서울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워낙 유명한 작품임에도 자주 라이브로 들을 수 없는 곡이기에 당시 중학생이었던 필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객이 몰렸었다. 잠시 후 공연장 내부는 어두워지고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에 등장하며 연주가 시작됐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 기억을 흐릿하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유독 그 기억만이 인상 깊었던 것인지 당시 공연을 생각하면 딱 한 장면이 줄곧 떠오른다. 사실은 음악보다도 필자 옆줄에 앉은 꼬마 아가씨가 생각이 나는데, 연주 시작 때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무대를 지켜보다가 조금씩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나가자고 조르다가 또 해맑게 무대를 바라보며 감상하다 이윽고 또 어머니에게 나가자고 조르는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한 후 급기야 잠이 들었는데, 그사이 피아니스트는 한 시간이 넘는 드라마를 창조해 내고 이윽고 곡을 마쳤다.

필자는 곡을 감상하면서도 이 아이의 반응이 재미있어 곁눈질로 꽤 자세히 관찰했던 것 같다. 참 신기하게도 이 꼬마 관객의 반응이 이 곡의 움직임과 참으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곡이 평온할 때 맑은 눈으로 무대를 바라봤다가 곡이 상승하면 어머니에게 나가자고 조르다가 이윽고 곡이 다시 차분해지면 잠이 들었으니 말이다. 음악만 감상하러 온 필자에게 어쩌면 음악을 배경으로 하나의 연극을 보여준 셈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곡이 끝나고 관객들이 퇴장할 무렵 이 꼬마 아가씨는 그 누구보다도 개운하고 행복한 얼굴로 공연장을 나섰다. 숙면을 취한 탓인지 이 곡이 이 친구에게 새로운 삶을 불어 넣어줬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이날 연주됐던 곡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이 작품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1741년 건반악기를 위해 작곡했다. 이 곡 탄생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드레스덴 궁정에서 러시아 대사로 부임했던 카를 폰 카이저링크 백작은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의 개인 하프시코디스트였던 고틀리프 골드베르크가 자신의 취침 시간 동안 연주할 부드러운 작품 몇 곡을 바흐에게 의뢰했다는 것이다.

바흐는 여기에 변주곡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장가치고는 매우 장대하고 서양 음악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을 창작해 그에게 헌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백작은 이 곡을 무척 좋아해 바흐에게 금으로 만든 잔에 금화를 가득 담아 선물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일화가 정설인지는 현대의 음악역사학자들에게 있어 아직도 논란과 의심의 대상이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또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들어 있을 법한 대곡을 단순히 수면용으로 생각했다니 말이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에게 자장가를 맡긴 의뢰인이 ‘음악을 모르는 사람’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 곡에 ‘지나치게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곡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과연 이 작곡가는 하늘이 내려보낸 천재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곡의 구성은 처음에 부드럽고 우아한 사라방드 형식의 아리아로 시작해 서른 개의 변주곡이 뒤따르고 이어서 마지막에는 처음에 연주했던 아리아를 반복하며 곡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서른 개의 변주곡은 세 번째 변주곡마다 우리의 돌림노래라 설명할 수 있는 카논이 반복된다.

총 9개의 카논과 1개의 쿠오드리베트가 이 곡의 큰 기둥을 이루고 그 외의 변주곡에는 폴로네즈, 지그, 미뉴에트, 푸가타, 토카타, 라멘토 등 당시 유럽 지역의 거의 모든 건반 및 성악 작품 형식이 총출동해 거대한 하나의 예술 세계를 이루는 것 같다. 그래서 30개의 변주곡이 진행되는 동안 다채로운 음악이 귀를 사로잡지만 또 이 모든 것이 아리아를 기반으로 변주되고 있기에 하나의 큰 통일성을 이루어서 산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이가 이 작품을 들으며 가장 감동하는 부분은 이 서른 개의 변주곡이 끝나고 다시 처음에 들었던 아리아가 반복될 때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 들었던 그 아리아의 아름다움이 약 한 시간 동안 눈부신 여정을 지나 처음의 아리아로 돌아갈 때, 그 아름다움의 가치는 처음에 들었던 그것과는 또 다른 미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에 한 불교 사찰을 방문했었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그곳이 주는 평온함을 사랑하는지라 어렸을 때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종종 찾아가서 마음의 평온을 청하곤 한다. 사찰에 방문할 때마다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고 있는 수행자들, 또는 49재와 같은 종교 의례 등 불교의 윤회 사상이 담겨 있는 의식을 멀리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번 방문에서는 문득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떠올랐다. 바흐 시대에 흔히 보였을 하늘을 찌르는 고딕 첨탑의 교회가 아니고 이 곡이 연주됐던 카이저링크 백작의 궁정도 아닌 이 이역만리의 사찰에서 그의 음악이 떠오르다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변주곡의 아리아 주제가 숱한 여정을 통해 변주되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과정을 듣고 경험하는 동안 나 자신도 함께 정화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앞에 언급했듯 연주회장의 꼬마 관객을 비롯해 카이저링크 백작에게 숙면을 선사하고 이어 새로운 삶과 같은 시간을 선물해 주어서일까.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건 어쩌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 아닐까. 시스티나 대성당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처럼 죄를 심판받는 무시무시한 장면이 아닌 마음이 맑아질 때까지 수행하고 또 윤회를 빌던 사찰의 평온함이 이 곡과 비슷한 감성을 필자에게 전해주는 것 같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바흐 골드베르크 바레이션
피아노 글렌 굴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바레이션 음반 전후로도 수많은 레코딩이 있지만, 아마 이 작품을 현대의 대중에게 가장 강렬히 각인시킨 음반이 아닐까 싶다. 간혹 원전 연주자들에게 혹평을 받기도 하고 또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세계적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 등 그의 해석과 연주 스타일에는 수많은 평이 엇갈린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우리의 삶과 그것을 반영하는 예술에서 자신의 음악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그의 연주에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 하나로도 우선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