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나라를 그려놓은 사랑의 지도(Carte du Tendre). 사진 위키피디아
사랑의 나라를 그려놓은 사랑의 지도(Carte du Tendre). 사진 위키피디아

아침 알람이 울린다. 지체 없이 일어나야 한다. 1분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순식간에 씻고 옷을 챙겨 입은 다음 출근길에 나선다. 종종걸음으로 집 근처에 커피와 빵을 살 만한 곳을 살펴본다. 이왕이면 계산대에 줄이 없는 곳이어야 좋다. 그래야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 손에 제과점 봉투를 들고 연구실로 도착하는 길까지 버스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연이어 시계를 살펴본다. 이 모든 움직임이 한치도 어긋난 것 없이 빠르고 능률적이어야 한다.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능률이 떨어져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쉬는 시간이 많아서도 안 된다. 이후 퇴근길 또한 신속, 능률이라는 단어를 머리에서 되뇌며 집으로 바삐 돌아온다. 이렇게 하루가 끝났다.

글 시작부터 별 시덥지도 않은 일기를 써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오늘 하루 단 한순간이라도 사랑이나 인생의 철학, 삶의 열정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을까. ‘허클베리 핀의 모험’ ‘오즈의 마법사’ 같은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 나만의 왕국을 세우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자체로도 심장이 뛰었던 소년은 이제 어엿한 사회 구성원이 됐다. 이제는 모험보다는 안정을, 동경보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능률을 좇는 지금보다 미지의 세계를 상상했던 어린 시절에 ‘스스로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알았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유럽에서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다. 봉투를 뜯어 보니 3개월을 기다려 어렵게 구한 에세이 한 권이 담겨 있었다. 책 첫 장에 부록으로 지도가 한 장 끼워져 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지도를 꺼내서 펼쳐본다. 제법 큰 사이즈의 지도다. 도대체 어떤 나라의 지도이길래 석 달을 기다려 받았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건 바로 ‘사랑의 나라를 그려놓은 사랑의 지도(Carte du Tendre)’다. 물론 지도에 그려진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나라다. 남녀가 만나 사랑에 이르는 길을 묘사한 지도로써 마을과 길의 형태로 연애의 다양한 단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 지도는 1654~61년 프랑스에서 마들렌 드 스퀴데리 부인의 ‘클렐리’라는 소설에서 유래됐다. 카테린 드 랑부이에 등 당대 프랑스 프레시오지테(살롱문학) 사조를 이끌던 살로니에들의 영향 아래 완성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나라는 4개의 도시, 3개의 강, 2개의 바다, 1개의 호수 그리고 30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돼 있다. 당대 살로니에들에 따르면 남녀는 첫 번째 도시 ‘새로운 인연(Nouvelle-Amitié)’에서 만나 진실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이들은 나머지 3개 도시 중 한 곳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도시명은 ‘존경이 담긴 사랑(Tender-sur- Estime)’ ‘감사가 담긴 사랑(Tendre-sur- Reconaissance)’ 그리고 ‘애정이 담긴 사랑(Tendre-sur-Inclination)’이다.

연인들이 이 목적지에 가는 건 마냥 쉽지 않다. 물론 새로운 인연이라는 도시에 흐르는 ‘애정의 강(Inclination Fleuve)’을 타고 가면 곧장 목적지 중 하나인 ‘존경이 담긴 사랑’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향한 열정이 과도하다면 바로 이 도시 뒤편에 펼쳐지는 ‘위험한 바다(La Mer dangereuse)’에 닿게 된다. 

그 외에 다른 목적지로 가는 다른 길에는 사랑의 발전 단계에 따라 여러 마을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의 편지(Billet-Doux)’ ‘정직(Probité)’ ‘존경(Respect)’이라는 마을에 도달하면 연인의 사랑이 깊어지지만, 그들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냉랭함(Tiédeur)’ ‘망각(Oubli)’이라는 마을을 거쳐 마지막에는 ‘무관심의 호수(Lac d’Indifference)’에 도달한다.

17세기 중반 프레시오지테 사조를 이끌던 프랑스 파리 살롱에서는 이 지도를 놓고 토론했다고 한다. 인간이 참된 지성과 고결한 감성, 정직, 신뢰 등 가치를 통해 진실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들은 ‘단순히 좋아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한다’는 사랑의 외적인 결과에 집중하지 않고, 진실한 사랑을 맺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이러한 가치는 당시 그들의 언어 및 삶의 방식에도 비슷한 양식으로 나타났다. 일상 대화를 나눌 때도 거울을 ‘친절한 조언자’, 눈을 ‘영혼의 거울’, 안락의자를 ‘대화의 편안함’으로 표현하는 등 과장된 시적 표현이 담긴 언어를 사용했다. ‘행위’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기보다, ‘그 자체에 삶의 아름다움이 깃들어야 하는 것’으로 본 셈이다. 

대화뿐만이 아니다. 당시 음악도 비슷한 사조로 흘렀다. 프랑스 바로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작곡가라 불리는 프랑수아 쿠프랭도 그렇다. 그는 화려하고 거대한 작품 대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하고 고상한 감정을 표현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시적인 제목을 붙였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진 나이팅게일’ ‘방황하는 그림자’ ‘미스터리한 바리케이드’ 등이다. 

그의 음악은 분위기가 화려하지도, 박자가 빠르지도 않다. 하지만 섬세함과 우아함을 담고 있다. 감상자가 음악을 경험하는 그 순간, 그 자체를 고귀하고 진지한 순간으로 느끼게 하는 식이다.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일부는 ‘음악이 다소 지루하다’ ‘모두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사로잡힌 뒤, 헤어 나올 수 없이 빠져들어 마니아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미술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을 찾을 수 있다. 장 앙투안 와토의 ‘시테라섬의 순례’도 그중 하나다. 시테라섬이라는 신화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연인들의 자태를 우아하게 표현한 그림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따라서 앞에 언급한 프레시오지테 사조가 반영된 사랑의 지도든 프랑수아 쿠프랭의 음악이든, 또 장 앙투안 와토의 페트 갈랑트 그림이든 간에 오늘 하루종일 필자의 삶을 지배했던 ‘신속함’ ‘능률적인’이라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이 단어는 정반대다. 우리 현대가 미덕으로 삼는 많은 가치관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길의 여정 또한 그만큼 가치 있고 아름답다. 이러한 점을 깨닫게 해주는 17세기 프랑스 예술에 깃든 정신이 어쩌면 필자와 같은 현대인의 목마른 영혼을 적셔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연주학 박사, 함부르크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가브리엘 피에르네 
‘사랑의 나라로 여행
(Voyage au Pays du Tendre)’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지휘자, 작곡가이기도 한 가브리엘 피에르네가 ‘사랑의 지도’에서 영감을 받아 1935년 작곡한 작품이다. 피에르네는 한 시즌당 보통 50회 가까운 공연을 했다. 그는 매우 바쁘고 지친 삶을 살던 와중 고상함, 우아함, 재치 등의 가치를 추구했던 17세기의 프랑스에 매료됐다고 전해진다. 또 독일 음악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시기 프랑스 음악을 바탕으로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지도에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연인들을 묘사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위트가 넘치고 또 이국적인 화성 진행과 더불어 동경, 질투의 감정까지 담아내는 등 사랑을 찾아 여행하는 연인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