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제엔주흐트를 테마로 한 독일 낭만주의 시대 회화 중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제엔주흐트를 테마로 한 독일 낭만주의 시대 회화 중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2년 전 일본 연주 투어 중 도쿄에서 현지 음악 잡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독일어 단어는 무엇입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단어 중에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니. 다행히 마음에 늘 담아둔 단어가 있어 곧 답을 했다. 바로 ‘Sehnsucht’다.

한국어로 대략 ‘제엔주흐트’라고 발음하는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모국어가 한국어인 필자는 이 단어를 번역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저 난감해진다. 이러한 번역의 어려움은 한국인인 필자뿐만이 아닌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였는지 독일·프랑스 합작 국영 방송사인 ARTE 채널에서 이 단어의 풀이를 두고 최근 흥미로운 영상을 제작했다. 한국에서는 종종 ‘동경’이라고도 번역하는 이 제엔주흐트라는 단어를 ARTE 방송에서는 불어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désir ardent 격렬한 열망
attente passionnée 정열적인 기다림
nostalgie 노스탤지어
langueur 번민
impatience 초조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의 삶은 바로 제엔주흐트 그 자체다. 사진은 슈베르트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의 삶은 바로 제엔주흐트 그 자체다. 사진은 슈베르트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따라서 제엔주흐트는 격렬히 열망하며 기다리고, 동시에 노스탤지어에 잠기어 번민하며 초조해하는, 그러니까 이 모든 게 하나의 뜻으로 함축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제엔주흐트는 시대를 넘나들며 독일어권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있어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 됐다. 독일 지방의 길고 어두운 혹한의 겨울에서 따뜻한 봄의 햇살을 갈구하는 갈망, 열정을 다해 마음을 뱉어내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희망을 향한 염원 등의 감정이 담긴 단어다. 제엔주흐트는 예술뿐만 아닌 우리 삶에도 늘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낭만주의 성향의 단어는 모차르트를 비롯해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 독일어권 많은 작곡가의 영감을 자극했다. 그들 작품 제목에서도 이 단어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에게 있어서 이 제엔주흐트 하면 단 한 명의 작곡가가 떠오른다.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다. 그의 삶은 바로 제엔주흐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는 열정과 사랑을 자신 음악에 쏟아 작품을 발표했지만 당시의 사회는 그를 알아주지 않았고 거기서 좌절을 느꼈지만 다시 사랑을 쏟는 일을 반복하며 세상이 알아주길 갈망했다. 또 경제적 궁핍과 말년에 닥친 매독 악화 탓에 삶의 마지막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그의 편지와 삶 그리고 음악 한쪽에는 늘 희망과 동경이 가득했다.

슈베르트의 제엔주흐트한 삶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죽음 직전 마지막으로 낸 작품인 피아노 소나타 작품번호 960이다. 연주 시간만 40분이 넘는 이 대곡은 슈베르트의 추상이 단순한 소박함으로 귀결된 명작이다. 많은 예술가 및 평론가들은 백조의 노래라고도 표현하며 독일어권 낭만주의 시대 최고의 피아노 걸작 중 하나라고 칭송하지만, 발표 당시에는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이 작품을 헌정받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가 로베르트 슈만도 다소 실망스럽다고 평가하였으니, 슈베르트의 예술과 삶 또한 그가 갈망하던 꿈에 다다르지 못하고 결국 그 문턱에서 동경 자체로 남았어야 했다고나 할까. 슈베르트의 이름을 아는 현대인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곡이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취급을 받았다 하니 무척 속상한 일이다.

1828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총 4개의 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필자의 감상을 바탕으로 이 곡을 소개하자면, 이 곡은 안개가 내려앉은 호숫가로 나아가는 듯한 1악장, 죽음으로 가는 시계 소리가 들리는 듯한 2악장, 환영을 보는 듯한 3악장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정신이 나간 듯한 4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 곡의 백미는 맨 마지막 부분이다. 모든 열망과 번민이 잠잠해지고 사그라드는 듯 피아노 소리도 들릴 듯 말 듯한다. 음악이 멈추고 정적이 지속되다 갑자기 열정적으로 피아노 건반의 전 음역을 두드리듯 엄청난 속도로 전진하며 곡을 끝맺는다.

사실 필자는 이 곡을 칠 때마다 항상 마지막 부분이 이해가 안 됐다. 마지막 부분만 아니면 이 곡은 참 아름답게 끝날 수 있을 텐데 슈베르트는 왜 이런 부분을 넣었을까? 수년이 지나고 어느 날 이 곡을 무대에서 끝 맺으며 문득 새로운 감정에 맞닥뜨렸다. 이 괴기한 빠른 부분은 어쩌면 늘 갈망하고 번민하는 연옥과 같은 곳에서 빛이 머무는 세상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 어떠한 강력한 힘이 아닐까 말이다.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제엔주흐트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사랑하는 이들과 감격의 포옹을,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하물며 예전과 같은 소소한 일상의 복귀를 꿈꾸고 격렬히 갈망하지만 당장 실현할 수 없음에서 나오는 번민과 초조 말이다. 전 세계 모든 이의 마음이 제엔주흐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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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960
알프레드 브렌델

‘방랑자’라고 불리는 슈베르트는 음악을 듣는 동안에도 듣는 이를 방랑의 길 한가운데로 이끈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를 감상하면 독자들에게 어떤 제엔주흐트가 전해질지 궁금하다. 이 곡의 명해석 중 하나로 꼽히는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를 권해본다.

안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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