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엔딩 컷은 연인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베개 위에 목덜미를 기댄 장마르크와 그 위로 10㎝쯤 고개를 숙인 샹탈이 스탠드 아래 머리를 맞댄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고 말한다.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다고. 눈을 깜빡거리는 순간 당신이 있던 자리에 다른 남자가 끼어들까 봐 두렵다고. 그러자 남자가 여자에게 입을 맞추려 한다. 여자는 키스를 거부하며 다시 말한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대사.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침대맡에 놓인 스탠드를 끄지 않고 잠드는 건 내 오랜 습관 중 하나다. 불빛이 있으면 숙면을 취할 수 없고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건 건강에 해롭다는 소리를 어딘가에서 들은 것 같다. 사실 어딘가에서 듣지 않았더라도 여러 가지로 좋을 리 없는 악습관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요즘은 불을 끄고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오래된 습관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사는 집은 종종, 실은 자주, 밤새 스탠드가 켜져 있다. 불을 끄지 못하는 버릇의 시작은 본격적인 입시 레이스에 올라선 중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내게 수면은 싸워야 할 적이었으므로 불을 끄지 않는 건 수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지쳐 잠들 때까지 읽고 쓰고 외웠다. 스탠드 불을 끄는 건 자발적 숙면 상태에 돌입하겠다는 뜻이므로 불 끄기는 일종의 항복 행위라고, 내 무의식은 믿었던 것 같다. 습관이니 버릇이니 했지만 실은 강박이고 불안이었을 것이다. 잠드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외웠던 것들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지킬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불빛에 의지하고 싶었던 무모한 강박. 이젠 절박하게 매달릴 시험 따위 없지만 그때 그 마음은 흔적으로 남아 지금도 나는 좀처럼 하루를 끝내지 못하고 불도 못 끄는 미련쟁이가 되었다.

다시 엔딩 장면으로 가자. 어둠을 거부하는 샹탈의 말은 장마르크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마음을 내비치고 있지만 그녀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장마르크의 부재가 아니다. 사라질 수 있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시선. 장마르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다. 따라서 샹탈의 말이 가리키는 불안감은 기실 자기 자신의 불안감에 다름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자신의 시선, 즉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고 있지 못한 자의 근원적인 강박이 스탠드 불을 끄지 못하고 내내 방을 밝혀 두는 이유인 셈이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는 건 내 손으로 오늘 하루를 끝내는 일이다. 오늘의 엔딩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엔딩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불안과 강박을 안고 잠들지 않는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도 장마르크와 함께할 수 있다면 밤을 밝히는 불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쿤데라의 ‘정체성’은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감각하지 못하는 연인의 낯선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어린 아들의 죽음 이후 샹탈은 남편과 이혼하고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늙어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끼던 샹탈은 어느 날 장마르크에게 말한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 장마르크는 샹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남자들이 더 이상 당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정말 그것 때문에 슬픈 거야?” “그래, 남자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당황한 장마르크는 ‘시라노’라는 익명의 존재로 그녀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로 하여금 여전히 관심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장난삼아 보낸 편지를 받아보는 샹탈이 점점 더 시라노의 매력에 빠지자 장마르크는 자신이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에게 질투를 느낀다. 

편지 사건과 함께 세 사람 사이의 경계는 무너진다. 시라노와 장마르크는 다른 사람일까. 샹탈에게 편지를 보낸 건 장마르크일까 시라노일까. 사실과 몽상,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며 경계는 사라진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샹탈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일지 모른다고 장마르크는 생각하지만 정작 장마르크 역시 샹탈을 알아보지 못한다. 꿈속에서 장마르크는 샹탈을 보고 뒤쫓아 가지만 그를 향해 돌아서는 샹탈의 얼굴은 샹탈의 그것이 아니다. 꿈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은 반복된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인공의 빛이 없으면 자신도 타인도 확인할 수 없는 희미한 인간들의 가난한 채도를 반영한다. 나는 무엇으로 인해 ‘나’일 수 있을까.

“우리의 종교는 생의 찬미야.” 그러나 현실을 장악하는 건 권태로움이다. “권태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수동적 권태. 춤을 추고 하품하는 소녀. 적극적 권태. 연 애호가. 반항적 권태. 자동차에 불 지르고 창 유리를 깨는 젊은이들.” 불을 켜는 것은 시선을 떼지 않는 최초의 방법일 수 있으나 시선을 유지하는 궁극의 방법일 수는 없다. 상대방을 발견하는 건 조도를 결정하는 조명의 일이 아니라 마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엔딩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밀란 쿤데라

1929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 브륀에서 태어났다. 체코가 소련군에 점령당한 뒤 시민권을 박탈당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체코 민주화 이후 본국으로 임시 귀국했으나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 현재까지 프랑스에 정착해 살고 있다. 데뷔작이기도 한 ‘농담’에서는 사회주의 체제의 전체주의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풍자적 내용을 담아 체코에서의 집필 활동이 금지됐고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역사 앞에 선 개인의 운명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작가 특유의 철학적이고 희비극적 요소로 풀어내며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