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핀 오는 “남녀 균형, 연령 균형, 세대 균형이 곧 사회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델핀 오는 “남녀 균형, 연령 균형, 세대 균형이 곧 사회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DC의 ‘원더우먼’과 마블의 ‘캡틴 마블’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진실의 올가미를 쥐고 부활한 원더우먼? 범우주적인 에너지를 자랑하는 캡틴 마블? 질문이 틀렸다. 그들은 싸우지 않는다. 불합리라는 빌런을 상대하기 위해 연대할 것이다.

갈등을 부추기고 싸움을 붙여 승자와 패자를 가리던 시대는 지났다. 이 시대의 슈퍼파워는 제압이나 흡수 통합이 아니라 협력과 협업이며, 히어로들은 각자가 주인공인 시나리오 안에서 고유의 매력으로 서로의 성장을 도울 뿐이다. 보이지 않았던 ‘여성 세계’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남성 디폴트’ 세계의 다양성 룰이 바뀌고 있다.

델핀 오(36·한국명 오수련)를 소개한다. 오바마와 마크롱의 열렬한 지원을 받으며 정치 무대와 국제 무대에 데뷔한 젊고 파워풀한 리더. 2017년 마크롱 정부가 출범할 때 프랑스 정계의 핵심 인물로 활약한 하원의원이자 현재 UN 세대평등포럼(The Generation Equality Forum) 사무총장. 한국계 프랑스인인 그는 CICI(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에서 한국의 위상을 알린 공로자에게 주는 한국이미지상 징검다리상 수상자로 선정돼 한국을 방문했다.

검은 한복 저고리에 레오파드 스타킹, 롱부츠를 신고 나타난 델핀은, 임신 4개월인 채로도 피로한 기색 없이 인터콘티넨탈 서울 코엑스를 씩씩하게 누비고 다녔다. 다부진 표정에서 자신감과 생명의 기운이 흘러넘쳤다. 나는 몇 해 전 같은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오영석 박사(전 카이스트 교수)와 인사를 나눴고, 이듬해 델핀의 오빠인 세드릭 오(현 프랑스 디지털경제부 장관)를 인터뷰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엘리제궁 만찬에서 ‘오씨 남매’를 문재인 대통령 부부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민자와 여성, 소수자, 청년을 앞세워 젊은 정치를 시작한 마크롱 정부는 비판적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고, 델핀은 현재 집권 정당 앙마르슈(En Marche·전진하는 공화국)를 나와 글로벌 외교 무대와 여성 인권 현장을 뛰고 있다.

델핀을 만나기 전에 CICI 이사장인 최정화 한국외대 교수는 내게 국제 무대에서 그녀가 얼마나 주목받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세계 최고 지성이 모이는 파리고등사범학교,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나와 중동 지역 전문가로 활약한 그는 20대부터 오바마 재단이 선정한 차세대 유럽 리더 10인에 선정됐다. UN 여성기구와 프랑스가 주도하는 UN 세대평등포럼은 전 세계 여성 리더가 모이는 국제 회의로 이방카 트럼프가 오래도록 열망했던 자리다.


델핀 오는 프랑스 하원의원을 거쳐 UN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델핀 오는 프랑스 하원의원을 거쳐 UN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작년 겨울, 마크롱 정부의 브레인이자 당신 오빠인 세드릭 오 디지털경제부 장관을 인터뷰했다. 그가 ‘델핀이 공부를 더 잘했고 아버지가 덜 엄격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델핀이 덜 한국적이다’라고 했는데, 사실인가.
“(웃으며 발끈하며) 내가 더 좋은 학생이었고 아버지 말을 잘 들었다. 오빠는 엄격한 교육이 더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매우 한국적이다. 늘 내 절반이 한국이라고 생각해왔다. 2007년에서 2008년까지 1년 동안 한국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내가 한국말을 잘 못하고 할머니는 프랑스말을 잘 못했지만,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할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나.
“회복 탄력성! 역경을 딛고 튀어 오르는 힘이랄까. 할머니는 한 살 된 아들을 데리고 6·25전쟁 직전에 국경을 넘었고 담배 공장을 다니며 홀로 삼 남매를 키웠다. 나는 살면서 할머니처럼 전쟁과 죽음과 끝을 겪지 않았지만, 그녀의 투지와 회복력을 이어받았다. 그분을 존경하고 내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다.”

당신 남매가 친할머니 여은희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라고 알고 있다. 프랑스인이 알제리 선조를 찾아가듯 당신들의 핏줄을 추적하겠다고. 진행 상황은 어떤가.
“오빠와 함께 계획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 30~40년 전 북한 자료를 얻기 어렵고, 가족 중에 돌아가신 분도 많다. 하지만 할머니의 많은 DNA는 이미 내 몸속에 저장돼 있다(웃음).”

몇 년 전 하원의원 시절에 한국 국회에서 청년들과 젊은 정치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프랑스 정치는 어떻게 세대교체가 가능했나.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강한 시절이었다. 20~30년 동안 같은 정치인이 등장하는 데 대한 사회적 피로가 컸다. 젊은이들의 요구가 거셌고 그 힘의 물줄기로 새로운 정당 앙마르슈를 만들었다. 우리는 캠프에 간이침대를 놓고 스타트업 같은 분위기로 일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청년이 모여들었고, 거기에 기존의 정치인들도 포용해서 기반이 만들어졌다.”

2017년 당시, 앙마르슈 정당은 정치 경험 없는 2만여 명 시민의 이력서를 인터넷으로 받았고, 남녀 똑같은 비율로, 기성 정치인과 신인을 절반씩 공천했다. 마크롱은 ‘여성들은 경력 없다고 시간 없다고 자기 검열하지 말고 더 많이 정치에 참여해달라’고 독려하는 동영상을 찍어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를 눈앞에서 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부모 세대가 결정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프랑스 청년들은 2017년 대선과 총선을 ‘68운동’의 세대교체 흐름으로 이어받았다. 변화의 물살은 거셌고 하원의원 중 75%가 초선으로 물갈이됐다. 전체 연령은 10세 이상 낮아졌으며, 여성은 전체의 39%로 상승했다. 델핀은 파리에서 가장 가난한 구역 중 하나인 19구에 출마했다.

프랑스의 세대교체는 확실히 EU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한국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날 거다.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이 참여하길 바란다.”

델핀 오는 “남녀 균형, 연령 균형, 세대 균형이 곧 사회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름과 소수를 포용할수록 혁신과 진화가 일어나며 그것은 윤리 이전에 지구 생태계의 원리다.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여성의 참여가 늘어났지만 아직 여성 총리, 최고경영자(CEO), 국회의장 등 리더의 자리에 여성의 역할이 절실하다. 프랑스의 40대 대기업 수장 중 여성 CEO는 한 명에 불과하다.”

균형을 찾아가는 것에 대해 프랑스 정계의반발은 없었나.
“전 세계 어디든 남성 중심 조직의 반발은 심하다. 남성 정치인들은 ‘역차별’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배제당했던 능력 있는 여성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이다.”

불의에 민감한 건 기질인가.
“어릴 때부터 집에서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커서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나조차도 학습된 편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조차 남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더라. 하버드를 나와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후에는 제3세계 여성 인권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체감했다. 프랑스가 40%의 하원을 여성으로 채웠지만, 여전히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여성은 임금 차별과 각종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나.
“6월에 열리는 UN 세대평등포럼에서 각국의 리더들과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계획이다. 한국도 외교부, 여성가족부 장관 등이 참석해주길 요청했다. 50년 전과 비하면 교육, 임금 등에서 많은 것이 나아졌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불평등이 더욱 심화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금융, 자동차 등 남성의 일자리가 타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관광, 패션, 외식 등 여성의 일자리가 더 많이 사라졌다.”

델핀은 차분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성은 바깥일과 가사라는 이중 부담을 지게 됐다. 20년 동안 가정과 일의 균형을 맞춰왔는데, 코로나19로 급후퇴했다. 가정 폭력은 30% 증가하고, 개발도상국의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1100만 명의 소녀가 강제 조혼을 당하고 더 이상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현재 프랑스 내부에서는 개혁의 아이콘이었던 마크롱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고통을 호소하는 중산층의 반발과 최근의 코로나19 대처의 미숙함 때문인데, 어떻게 보고 있나.
“마크롱과 함께한 것에 후회는 없다. 우리는 새로운 젊은 지지자들과 희망의 정치를 꿈꿨다.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희망도 있었기에 실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린 인간이고 결함이 있다. 권력자로서 마크롱이 현명하지 못한 선택도 했다. 그러나 2017년의 승리로 프랑스는 유럽 정치의 낡은 흐름을 바꿨다. 그간 마크롱의 실책에 대한 반발도 있지만, 오바마가 미국의 이미지를 쇄신했듯이 마크롱도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바마 이후에 트럼프가 나왔고 세계의 민주주의는 후퇴했는데.
“오바마 시절은 변화가 빨랐고 공격받는다고 느끼는 층이 많았다. 그 반작용으로 트럼프 지지자가 생겼다.”

프랑스도 그런 우려는 없나.
“약간은 있지만 미국만큼은 걱정하지 않는다. 프랑스와 미국은 인구 구성이 다르다. 미국에서 시위를 일으키는 공격적인 인구집단이 프랑스에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덜 극단적이고 덜 과격하다. 그러나 포퓰리즘 정치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공직과 사회 헌신에 대한 신념은 어떻게 생겼나.
“예전부터 사회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좀 강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부모님께서 심어주셨다. 오빠와 나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직업과 기회를 얻었다. 그건 특권이고,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하다.”

요즘 당신은 어떤 질문을 갖고 있나.
“2년의 시간에 올 6월에 열릴 UN 세대평등포럼을 준비했다. 첫 질문은 ‘그다음 미션은 무엇일까?’다. 두 번째 질문은 ‘코로나19 위기 속에 더 평등한 세상이 왔을까?’다. 현재 인류의 최우선 과제는 백신과 보건이다. 그 와중에서도 ‘다양성과 사회적 균형’이라는 이슈를 놓쳐서는 안 되고 내 직업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또 하나의 질문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나는 지금 임신 중이고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폭력적이고 험난한 세상에서 이 아이를 어떻게 보호할까? ‘내가 투쟁했듯 이 아이도 어떻게 하면 투쟁할 용기를 갖게 해줄까’를 고민 중이다.”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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