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전의 은은한 맛이 너브내 화이트 스위트의 화사한 풍미를 잘 살려준다. 사진 김상미
감자전의 은은한 맛이 너브내 화이트 스위트의 화사한 풍미를 잘 살려준다. 사진 김상미

며칠 전 횡단보도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다 우연히 옆에 선 청년에게 눈길이 갔다. 그는 한 손에 냉동 피자를 또 한 손에는 와인을 들고 있었다. 때는 마침 금요일 저녁,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외출과 모임이 자유롭지 않다 보니 집에서 조용한 ‘불금’을 보낼 계획인 듯했다.

와인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됐다. 와인 수입 총액은 2020년 1~11월 기준 2600억원을 넘기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형마트에서도 와인이 맥주와 소주를 제치고 주류 판매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젠 주말에 장을 보며 와인 한두 병쯤 카트에 담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는 20여 년 전과는 딴판인 모습이다. 당시 회사원이었던 필자는 금요일 퇴근 후 동료들과 홍대 앞 LP 바에 가곤 했다. 그곳에서 자주 주문했던 술이 바로 국내 와인 마주앙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주앙이 그 가게에서 파는 유일한 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마주앙을 찾기가 쉽지 않다. 수입 와인에 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탓일 게다.

우리나라 와인은 1960~70년대 출시된 후 20년간 인기를 끌었다. 정부는 당시 식량이 부족해지자, 곡주 생산을 금지하고 과일을 활용한 와인 생산을 장려했다. 아련한 추억이 담긴 마주앙, 노블 와인, 파라다이스 등이 그 예다. 해태주조, 동양맥주 등 대기업에서 출시한 이 와인들은 한때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해 와인 수입이 자유화되자 심각한 판매 부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지금은 마주앙을 제외한 대부분이 단종된 상태다.

한국 와인의 불씨는 2007년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되살아났다. 생과 시장에서 수입 포도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보다 국산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과거의 기업형과 달리 이번엔 농가형 와이너리 시대의 시작이었다.

국내 와이너리는 처음에는 생과로 먹던 캠벨 얼리나 거봉 등으로 와인을 만들었다. 샤르도네나 카베르네 소비뇽처럼 세계적인 품종도 시도해봤지만, 여름이 덥고 습하며 겨울이 혹독하게 추운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종 포도가 잘 자라지 못했다. 다행히 그동안 품종 개량에 꾸준히 힘쓴 결과, 이제는 우리 환경에 맞는 양조용 포도가 다수 개발된 상태다. 드디어 우리 포도로 만든 한국 와인이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국내 양조용 포도 가운데 독보적인 것은 청수다. 청포도인 청수는 원래 1993년 생식용으로 육종됐지만 낙과율이 높아 농민들이 외면하던 품종이다. 그러다 2008년부터 청수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 뛰어난 풍미를 입증하면서 다시 인기몰이했다. 안산시 대부도에 위치한 그린영농조합의 그랑꼬또 청수와 경북 경산 비노캐슬의 비노 페스티바 화이트 등 국내 여러 와이너리에서 청수 와인을 출시하고 있다.

특히 그랑꼬또의 청수는 아시아와인트로피에서 2015년부터 매해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대전에서 열리는 아시아와인트로피는 전 세계에서 4000여 종의 와인이 출품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제 와인 품평회로, 필자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외국의 와인 전문가들은 “청수의 맛이 부드럽고 라임, 참외, 멜론 등 과일 향이 생생하다”며 “한국 와인만의 개성이 돋보인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외국 와인을 제치고 수상을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성과다.

청향도 기대되는 신품종이다. 강원도 농업기술원이 개발한 이 청포도는 맛이 뛰어나 식용으로도 가능하지만 가격이 비싼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싼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곳이 있다.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샤또 나드리다. 이들이 만든 너브내 화이트 스위트와 스파클링 와인은 수입 와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청사과, 라임, 레몬 등 과일 향이 산뜻하고 아카시아 같은 흰 꽃 향이 은은해 향긋함과 신선함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샤또 나드리의 너브내 레드 와인도 매력적이다. 이 와인에서는 체리, 라즈베리, 붉은 자두 등 잘 익은 과일 향과 함께 후추의 톡 쏘는 매콤함과 바이올렛 같은 꽃 향도 살짝 느껴진다. 타닌이 강하지 않고 질감이 매끄러워 평소 레드 와인의 떫은맛을 싫어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맛있게 즐길 수 있다.

너브내 레드는 블랙아이와 블랙선이라는 포도로 만드는데, 이 품종들도 강원도 농업기술원이 와인 전용으로 개발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품종들이 토종 머루를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5만원권 지폐에 있는 신사임당이 그린 포도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머루다. 머루는 무척 늦게 익기 때문에 서리가 내릴 때쯤에야 수확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 양조용 포도로 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건조한 가을을 지나는 동안 포도가 수분을 잃고 당분과 향을 응축시키기 때문이다. 안토시아닌이 일반 포도보다 훨씬 더 많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만든 한국 와인도 주목받는다. 그중 대표 주자가 오미자다. 경북 문경의 오미나라는 2007년부터 오미자로 오미로제라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매운맛이 모두 들어 있는 오미자는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독특한 개성을 발휘한다. 매콤하고 향기로운 오미자 향이 새콤달콤한 맛과 어우러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완성한다. 오미로제는 외국 와인 전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국빈 방한이나 평창 패럴림픽 등 큰 행사에서 만찬주로 자주 채택되며 이미 품질을 인정받았다.

속이 빨간 사과로 만든 로제 와인도 있다. 충남에 위치한 예산사과와인의 추사 로제 스위트는 레드 러브라는 사과로 만든다. 스위스가 원산지인 이 품종은 껍질은 물론 과육도 붉은색을 띤다. 맛을 보면 사과의 상큼함과 은근한 단맛이 맛있는 밸런스를 이루고 붉은 꽃 계열의 향미가 그윽하다.

자두로 만든 와인도 인기다. 충북 영동 샤토미소의 웨딩 자두 와인은 와이너리 대표가 딸의 결혼을 기념해 출시한 와인이다. 연한 오렌지 빛깔이 사랑스럽고 자두 특유의 달콤함과 새콤함이 깔끔한 매력을 뽐낸다. 이 와인도 아시아와인트로피와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매년 연속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 중이다.

그 나라의 와인은 그 나라의 음식과 즐길 때 가장 맛있다고들 한다. 그래선지 한국 와인은 우리 음식과 특히 잘 어울린다. 타닌이 강하지 않아 매운맛과 부딪치지 않고 간장의 짭조름한 향미와도 맛깔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전통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인터넷 주문이 가능해 코로나19 시대에 ‘집콕’하며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이제 곧 설 명절이다. 정성껏 장만한 음식에 한국 와인을 곁들여 보면 어떨까. 상큼함이 입맛을 돋우고 향긋함이 음식의 맛을 살포시 보듬는 최고의 궁합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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