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 부부의 초상화. 에두아르드 카이저의 1847년 작품. 사진 위키미디어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 부부의 초상화. 에두아르드 카이저의 1847년 작품. 사진 위키미디어

피아노 위에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 ‘크라이슬레리아나’ 악보를 올려놓으며 필자는 생각한다. ‘아, 오늘 잠을 또 못 자겠구나.’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리고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연주해 본다. 처음에는 정체 모를 기괴하고 난해한 음율이 흐른다. 이어 꿈꾸는 듯 하늘을 자유로이 누비는 느낌이 들다가 깊은 사랑에 빠진 듯하고 따사로운 햇볕 속을 거니는 듯하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친 폭풍우로 바다 한가운데에 처박힌다. 연주하고 나면 필자의 마음에 내내 진동을 일으키곤 하는 곡이다.

슈만은 19세기 음악사에서 정의하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독일 낭만 음악의 최고의 대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작곡한 크라이슬레리아나는 스스로뿐만 아니라 훗날 음악 사학자들도 독일 낭만 피아노 문헌의 걸작이라고 칭송한다. 도대체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길래 밤새 잠들지 못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독일 낭만주의 문호 E. T. A. 호프만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다. 호프만은 1810년부터 약 5년간 신문에 ‘크라이슬레리아나’라는 소설을 연재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크라이슬러’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형식에 얽매여 있는 당시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을 담았다.

소설 속 크라이슬러는 성가대 지휘자로,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상처받고 불행했다. 그는 오직 피아노 앞에서만 위안을 얻었다. 슈만은 이러한 크라이슬러의 캐릭터에 매혹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자유롭다 못해 기괴하다고 할 수 있는 호프만의 광기 어린 문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바흐의 골드베르크 바레이션 마지막 30번째 곡을 연주하며 곡을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악보가 갑자기 거대하게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악보는 살아 움직이며 빛을 내뿜으며 내 주위를 미쳐 날뛰었다. 건반 위 내 손가락에 불꽃이 내뿜고 거기서 발산되는 내 영혼은 생각을 넘어서고 있었다.”


E.T.A 호프만과 그의 소설 ‘크라이슬레리아나’의 주인공인 크라이슬러 인물 스케치. 사진 위키미디어
E.T.A 호프만과 그의 소설 ‘크라이슬레리아나’의 주인공인 크라이슬러 인물 스케치. 사진 위키미디어

얼핏 보면 현대 SF 장르에서 볼 법한 초현실적인 표현 같다. 이 작품 전까지 유럽에서는 형식미를 중요시했다. 르네상스와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삼는 고전시대가 이어져온 셈이다. 하지만 호프만은 소설에서 기괴하고 광기 어린 표현을 통해 당시의 관습과 형식이 억누르는 인간 심연에 흐르는 추상적 판타지의 족쇄를 풀어냈다. 이는 형식미에서 벗어나 자신의 추상적 세계를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었다.

호프만의 소설 속 폭발적인 표현은 동시대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 슈만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했다. 슈만은 1838년 ‘8개의 환상을 위한 크라이슬레리아나’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듣는 내내 한 단어로 감히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의 추상적 심리를 표현한다.

사실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호프만 한 명이 아니다.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작곡에는 훗날 그의 부인이 된 클라라의 영향도 컸다고 할 수 있다. 클라라는 피아노 선생님의 딸이었는데, 슈만이 18세였던 1828년부터 이 작품을 작곡할 때인 1938년까지 10여 년간 교제했다.

하지만 클라라 아버지는 두 사람의 연애를 극렬히 반대했다. 클라라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인 딸을 먼 곳으로 연주 여행을 보내고 친구 집에 머물게 하는 등 슈만과 떨어뜨려 놓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고 한다. 1년 후인 1839년 슈만과 클라라는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상대로 당시 흔치 않던 법원 소송까지 진행했다고 한다. 반대가 얼마나 심했고, 슈만의 상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갈 지경이다.

슈만은 작곡 당시 클라라에게 “이 곡 한가운데에는 당신이 자리하고 있소”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는 달콤한 속삭임만 담겨있던 건 아니다. 클라라 아버지의 반대에 따른 고통, 슈만 특유의 자아 분열적인 성격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 세계를 음악으로 분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감정이 섞인 곡이기 때문일까.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연주만 하면 필자의 마음도 밤새 끊임없이 진동하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편한 마음이 싫지만은 않다. 결혼의 반대에 부딪히며 극렬히 고뇌하고 절망하는 감정이 있지만, 결국 그 안에 사랑이 자리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로베르트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 Op. 16’

연주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음반사 도이체그라모폰

낭만주의 피아노 작품 중 걸작답게 현재 수많은 음원이 온·오프라인상으로 출시돼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피아노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연주를 추천하고 싶다. 호로비츠는 소리를 가지고 크라이슬레리아나의 감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볼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인간의 추상적 세계를 피아노 소리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완벽히 그리고 정확히 전달해 낸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