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의 가족들은 혈연에 기반을 두지 않은 유사 가족이다. 사진 ‘어느 가족’ 홈페이지
‘어느 가족’의 가족들은 혈연에 기반을 두지 않은 유사 가족이다. 사진 ‘어느 가족’ 홈페이지

오늘도 하나의 가족이 죽었다. 아니, 가족 그 자체를 인격으로 볼 수는 없을 테니 하나의 가족이 무너져 내렸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글을 쓰고 있는 건 8월 28일 늦은 밤. 온갖 뉴스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충북 옥천의 네 모녀 사망 사건이다. 범인은 살해된 네 모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그는 “불어난 빚을 감당할 수 없어 혼자 죽으려 했지만, 남겨진 가족이 손가락질 받을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며, 그래서 가족을 죽였다고 경찰 조사에서 말했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이란 어떤 것이기에 등을 맞대고 잠을 자다가도 어느 순간 서로의 목을 조르는 걸까.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 물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돌려 말하거나 답을 미리 정해놓거나 침묵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만났다. 그의 영화 ‘어느 가족(万引き家族)’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어떤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가족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

고레에다는 피하지도 돌려 말하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름밤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그와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가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썰’을 푼 기분이었다.

고레에다는 ‘가족 영화’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이건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고레에다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으면 가족 영화 전문가라는 꼬리표에 의문을 제기하기 힘들다. 하지만 고레에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 영화를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가족’이라는 우리의 환상을 부수는 도끼 같다.

어째서 그런가. 고레에다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유사 가족’이다. 확실히 그의 영화에 나오는 가족 공동체는 혈연에 기반한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어느 가족’만 해도 여섯 명의 가족 구성원 중에 같은 핏줄은 없다.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모른다’의 네 아이는 엄마가 같지만 아빠는 서로 다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이야기는 6년 동안 소중히 키운 내 아이가 실은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세 자매가 배다른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되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전통적인 가족 모습과는 다른 ‘유사 가족’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그의 영화는 ‘유사 가족도 괜찮다’ 혹은 ‘유사 가족도 하나의 대안’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고레에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가 던진 질문은 ‘유사 가족도 괜찮다’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가족이 아니어도 괜찮다’까지 가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 ‘어느 가족’을 보면서 내가 찾은 실마리가 있다.

“가족이니까 서로 이해할 수 있다거나 가족이니까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가족이니까 들키기 싫다거나 가족이니까 모른다 같은 경우가 실제 생활에서는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영화 인생을 돌아보며 쓴 자서전에 고레에다가 남긴 말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가족 영화 전문가로 여기지만 실상 그가 하는 작업은 가족에 대해 우리가 가진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가족이 아니어도 괜찮은 것 아니냐고. 꼭 가족일 필요는 없지 않냐고.

이 질문은 ‘어느 가족’에서 안도 사쿠라가 연기한 노부요를 통해 반복된다. 가족의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던 노인 하츠에가 죽고 쇼타가 다치면서 어느 가족의 기묘한 동거도 끝난다. 노부요와 그의 남편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같은 동네에 살던 학대당하는 어린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를 몰래 데려와서 키웠는데, 이 사실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납치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쇼타가 입원한 날 그들은 문제가 생길 것을 짐작하고 도망치려 하지만 경찰에 잡히고 만다.

경찰 심문에서 노부요는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납치범 아니냐고.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게 아니냐고. 질문을 던진 경찰의 눈빛은 ‘당신은 가족을 파괴한 사람이야’라고 말없이 윽박지르고 있다.

노부요는 답한다. 누군가 버린 것을 주워온 것이라고.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한 게 아니라 엄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아니냐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두 손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아내는 와중에 언뜻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이렇게 되묻는 것 같다. 가족을 파괴한 게 누군지 정말 모르냐고. 그렇게 노부요는 고레에다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사진 ‘어느 가족’ 홈페이지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사진 ‘어느 가족’ 홈페이지

발목을 동여맨 가족이라는 끈

어쩌면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끈을 발목에 동여맨 채 이인삼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핏줄이라는 끈에 묶인 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과 나란히 걸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닐까. 어떤 이는 호흡을 맞추며 한 발 한 발 어렵지 않게 나아가겠지만, 어떤 이는 한 발을 내딛는 것도 지독하게 힘들 수 있다. 이인삼각의 파트너가 끊임없이 내게 주먹을 휘두른다면, 아니 칼을 들이민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기 위해서는 발목을 감고 있는 그 끈을 어떻게든 풀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은 함께 걸을 파트너를 고른 적도, 고를 수도 없었다. 옥천의 세 아이는 아빠가 주는 수면제를 아무 의심 없이 손에 쥐었을 것이다. ‘어느 가족’의 유리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추운 겨울날 베란다에서 떨었던 건 그의 부모 때문이었다. 오사무와 쇼타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유리는 눈밭에 얼어붙은 하얀 새처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느 가족’의 쇼타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본다. 이걸 희망이라고 부르기엔 쇼타가 서 있는 출발선이 또래보다 너무 뒤에 있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다만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길러준 아버지를 모두 뒤로 하고 혼자가 되기를 택한 아이. 스스로 가족의 끈을 끊어낸 아이. 온 세상의 가족이 무너져도 쇼타는 살아남을 것이다.


이 영화엔 이 술

라무네 하이볼

쇼타는 노부요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부요도 애써 엄마라는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 둘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모자(母子)로 보인다. 노부요와 쇼타가 밝게 웃으며 시장 골목을 지나가는 장면이다. 둘은 라무네 사이다 병에 담긴 구슬을 신기한 듯 흔들며 활짝 웃는다. 이 영화에서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다. 꿉꿉한 여름밤, 얼음을 가득 채운 하이볼을 한잔 마시면서 영화를 보면 어떨까. 라무네 사이다를 하이볼에 살짝 섞으면 한결 맛이 청량해진다. 쇼타와 노부요의 미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