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부지. 1900년대 이 일대에 대한제국의 중추 의료기관인 대한의원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진 조선일보DB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부지. 1900년대 이 일대에 대한제국의 중추 의료기관인 대한의원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진 조선일보DB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세계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심화됐다. 1900년대 조선이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후, 조선은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수도인 한양(1910년 일본 침략 후 경성으로 바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한양 동부지역(혜화·명륜·연건·동숭동 일대)은 지역 정체성이 급변했다. 과거 상인층 집적지역이던 동부지역이 1910년대 이후 전혀 다른 성격의 ‘학교촌’으로 변모한 것이다.

갑오개혁을 계기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반인층(泮人·성균관에서 일하는 노비)은 근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만들고자 ‘숭정의숙’이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숭정의숙은 강북 지역 최고 학교로 군림했던 혜화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 학교는 상인층인 반인층의 후원을 받아 재정적 어려움 없이 운영됐다.

경성 동부지역은 사대문 안임에도 여전히 미개발지역이 많았으며, 토지비도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했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부는 대형 시설 입지로 용이하다고 봤고 이 연장선에서 다양한 교육 관련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 교육제도와 실업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907년 혜화동 지역에 공업전습소(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 현재 서울공업고가 됨)가 설립됐다. 정원이 50명이었는데 첫해 지원자가 1000여 명 이상일 만큼 인기를 끌었다. 학교 행사에 총독을 위시한 간부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을 볼 때, 조선총독부는 공업전습소에 상당한 공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또 비슷한 시기에 경모궁 주변에 광제원과 의학교, 부속병원 등을 통합해 대한제국의 중추 의료기관인 대한의원을 설립했다. 현재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다. 총 16만1900㎡(4만9000여 평) 부지를 점유할 만큼 큰 규모였으며,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편됐다.

대한의원은 국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았으나, 예산 3분의 1을 진료 수입금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진료비가 상당히 고액이었다. 1910년 당시 경성 거주 일본인이 3만8000여 명이었는데, 일본인 입원 및 외래 이용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조선인 이용자도 7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중추적인 의료기관이었던 대한의원(오른쪽)과 경성제국대학. 당대 최고의 병원과 학교가 들어서며 지역 성격이 급변했다.
대한제국의 중추적인 의료기관이었던 대한의원(오른쪽)과 경성제국대학. 당대 최고의 병원과 학교가 들어서며 지역 성격이 급변했다.

인근에 경모궁이 있어 녹지가 울창했고, 자연 속에서 치유되는 아늑한 환경의 병원시설이었기에 당시 재경성 일본인과 조선 부유층이 주로 이용하는 병원으로 발돋움했다. 저개발 지역에 당대 최고 수준의 병원이 들어선 것이다.

“명치44년 10월 (1911년) 리 왕가(李王家)의 영희전 부지 전부(약 4000평)를 받았다. 이에 의원은 건평 1994평을 증축하고 본관 병실 4동, 별병실(別病室) 3동, 분병실(分病室) 3동, 간호부 기숙사 1동까지 본관 양측에 증축하는 등 894평을 더하여 총 2892평에 광대하게 건축하였다. 마등산 꼭대기 일대 미관을 이루어갔다. 의원 안의 진료를 내, 외, 안, 이비인후, 부인, 소아, 피부, 치과를 가설해 8개의 진료과목을 두었다. 각 과에 부과장, 직원, 조수, 간호부의 수도 증원하였다. 또 병실을 확장해 분만실, 세균실, 배양기실, 수술실, 전기치료실, X광선실 등을 설치하였다. 뒤뜰의 녹수가 울창해 회춘원 내에는 3동의 병실을 건설하고 산부인과, 일반 회복기 환자를 수용하였다. 소위 ‘세너토리엄(サナトリ–ウム)’식을 본받아 이 병동을 희망하는 조선 귀족 환자가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원이십년사, 1928, p.12)

혜화동 일대가 ‘학교촌’이라는 장소성을 확립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20년대 들어선 경성제국대학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예과(1924년 개교)와 본과(1926년 개교)로 나뉘었으며, 예과는 청량리에, 본과는 동숭동 소재 약 29만㎡(9만여평) 부지에 들어섰다. 경성제국대 입지는 주변 지가에도 큰 영향을 줘 1923년 3.3㎡당 5~6원에 불과했던 땅값이 대학 신축 후 26~27원에 이를 만큼 큰 폭으로 올랐다.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1912년 공업전습소 건물을 헐고 지어졌다.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1912년 공업전습소 건물을 헐고 지어졌다.

경성제국대학 들어서며 ‘학교촌’ 변모

경성공업전문학교·의학전문학교와 같은 관립학교, 경학원·불교중앙학원 등 사립학교가 자리했던 경성 동부 일대에 경성제대가 들어서면서 지역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내 동소문 부근 일대는 근년에 이르러 갑자기 번창하여 옛날과 면목이 다르게 되었으며 더욱이 숭1, 숭2, 숭3, 숭4, 혜화, 동숭, 연건동 등지에는 경성제대, 고등상업, 고등공업, 도립상업, 경학원 등의 학교와 기타 기관이 있어 학교촌을 이룬 형편으로 2000여 호에 1만 명이나 살고 통학하는 학생만 하더라도 2000명 이상에 이르러 어디로 보든지 손색이 없는 신시가를 이루었다.” (동아일보, 1926년 2월 26일)

혜화동 동숭동 일대가 학교촌으로 자리 잡으면서 인구가 늘자, 혜화동 일대를 넘어 성북동 일대로 주거지가 확장되기 시작했다고 조선일보는 전한다.

“… 주택지로 시내에서 사람이 나가기 시작하기는 5~6년 혹은 6~7년 전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북동과 인접한 동소문 안 숭2동, 숭4동 방면에 집이 많이 들어선 다음의 일이다. 즉, 성북동의 발전은 동소문 안 발전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옛날 같으면 숭2동, 숭4동 부근은 일종의 특수부락으로 취급하여 사람이 그리 살지 않았으나 중앙지의 주택이 조밀해지고 또 학교로 대학이며 의학전문, 고등공업, 보성고보, 불교전문, 동성상업, 고등상업 등 여러 학교가 들어서서 완연 학교촌을 이루게 되자 인가도 자연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같이 동소문 안이 발전을 보면서 성벽 하나를 넘어 성북동으로 나가는 사람도 자연 많게 되었다.” (조선일보, 1933년 10월 11일)

당대 최고 병원과 학교의 입지는 혜화동 일대의 장소성을 일거에 바꿨고 지가 상승과 주거지 확대를 견인했다. 20세기 초반 경성 동부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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