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SKY 캐슬’에서 상위 1%의 극성 엄마 한서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염정아(48세). 사진 아티스트컴퍼니
JTBC 드라마 ‘SKY 캐슬’에서 상위 1%의 극성 엄마 한서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염정아(48세). 사진 아티스트컴퍼니

자식을 서울대 의대에 보낼 수 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무릎 꿇고 돌을 맞아도 좋다”며 읍소하던 ‘SKY 캐슬’의 염정아에게 사람들은 돌멩이 대신 꽃을 던졌다. 욕망과 헌신을 장착한 현실의 엄마, 무늬만 ‘럭셔리한’ 잡초인 채로 지치지도 않고 번식하는 그녀의 ‘노오력’에 감탄해서다.

과외 선생을 구하러 대치동 학원가를 종종거리고, 힘센 시어머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입시 코디네이터에게 무릎을 꿇고, 고교 동창생에게 눈알을 부라리고, 이웃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브라운관에서 사방팔방 안쓰러울 정도로 뛰어다니는 염정아를 보며 생각했다.

현실에 저런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마냥 미워할 수는 없겠구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하이힐을 신고 서 있어도 저 발바닥은 온통 불덩이겠구나. ‘염드리 헵번’이라는 별명처럼 진주목걸이에 명품 원피스를 입고 다녀도, 정작 한 집안의 욕망을 집행하는 말단 집사로 남편에게, 시어머니에게, 자식에게 쓸모를 인정받으려는 그녀의 헌신적인 몸부림은 시청자의 공감을 얻어내며 비지상파 역대 최고인 23.8%라는 신화적인 시청률을 이뤄냈다.

언젠가부터 염정아는 우리에게 윤리나 교양 너머 현실의 생기를 깨닫게 하는 배우가 됐다. 모호한 여백 없이, 그날 가계부를 쓰듯 또렷하고 현실적인 생활 언어로 커리어의 빈칸을 메워온 염정아. ‘생존의 기품’을 지닌 28년 차 배우를 만났다.


연기가 생활감으로 더 좋아졌다. 겉절이는 겉절이대로 묵은지는 묵은지대로, 공장 김치와는 다른 깊은 맛이 있듯 당신 연기가 그렇다. 화면에서 겉돌지 않고 싱싱하면서도 깊다.
“(미소 지으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생활도 연기도 할수록 어렵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내가 그만큼 편하다는 거다. 사실 매 순간 헤쳐나가는 게 두렵지만 늘 그럭저럭 헤쳐왔다. 그래서 나한테 듬뿍 칭찬해준다. ‘잘했네!’ 하면서. 하하.”

영화 ‘완벽한 타인’의 수현과 드라마 ‘SKY 캐슬’의 한서진은 염정아의 DNA를 반반씩 나눠 가진 이란성쌍둥이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완벽한 타인’이 정말 좋았다. 원작에서와는 다른 한국식 캐릭터가 나왔잖나.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억눌리고 시부모와 관계에서 속끓이는 감정의 결이 풍성하게 드러나 정말 좋았다.”

‘SKY 캐슬’에서도 당신은 전투력이 탁월한데, 오직 시어머니와 남편에게만큼은 굉장히 순종적이더라. 기존 질서에 순응하려는 기질과 인정 욕구가 스파크를 일으킨다고 느꼈다.
“그런 면이 있다. 한서진은 모든 인물과 물어뜯고 싸워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는 그러지 않는다. ‘완벽한 타인’을 보고 많은 분이 ‘우리 엄마 생각나서 속상했다’고 했다. 영화에서 유해진씨가 어머니 헤어스타일 바뀐 것만 이야기하자 나중에 내가 그러잖나. ‘나 머리했다, 어머니만 한 거 아니야.’ 사람들 앞에서 내가 치마를 확 뒤집어야, 그 정도로 세게 나가야 ‘남편이 봐주는 거야?’ 싶은 거다. ‘SKY 캐슬’에서도 ‘어머니, 보세요! 내가 우리 애 서울 의대 보내서 당신 아들보다 더 잘되게 하겠다’는 그런 식의 도발이 나한테 있는 거다.”

순종과 도발이 뒤섞여서 기이하게 설득되는 지점이, 늘 염정아의 연기에 있었다. 밀린다 싶을 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서 확 지르기도 하면서.
“내가 중간 세대라서 그런 감정을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아갈머리 확 찢어버릴라”라는 대사를 내뱉을 땐 기분이 어땠나.
“재밌었다. 사실 입에 담지도 못할 무서운 말이잖나. 평소엔 교양을 온몸으로 휘감고 다니다가 ‘나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고 말문을 막아버리니까. 이렇게 대놓고 상스러울 수가!”

어떤 상황에서나 자기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활 집착형 인물’에 매료되는 건 본인의 취향인가.
“그런 인물이 끌린다. 물론 한서진은 좀 심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 말고는 관심이 없으니까.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적 인물이다(웃음).”

문득 영화 ‘장화 홍련’에서 두 자매(임수정·문근영)의 히스테릭한 새엄마로 등장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간 영화계에 없었던 하이톤(높은 음)의 주파수가 귓전을 울렸다.
“사실 난 그때가 아주 먼 옛날 같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7년 전 영화 ‘H’ 촬영이 끝나고서였다. 얼굴도 예쁘고, 연기도 잘하는 여배우가 사극에서 왕건의 둘째 부인 같은 전형적인 조연만 한다고 안타까워하던 봄 영화사 오정완 대표가 그녀를 영화계로 불러들인 직후였다. 이후 김지운 감독이 ‘장화 홍련’에서 염정아의 히스테리를 추출한 건 한국 영화사의 ‘화학적’ 쾌거였다. 아직도 꽃무늬 벽지를 뒤로 한 채 임수정과 문근영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성난 고양이 같은 얼굴과 감전될 듯한 높은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2004년 최동훈 감독이 그녀를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 스톤으로 호출하면서 염정아의 색깔은 더욱 분명해졌다. 복잡한 배후도, 사치스러운 죄의식 없이도 고압 전류가 흐르는 팜므파탈.


염정아는 영화 ‘카트(2014년)’에서 마트 노동자의 피로한 얼굴과 몸짓을 사실적으로 연기했다. 사진 카트
염정아는 영화 ‘카트(2014년)’에서 마트 노동자의 피로한 얼굴과 몸짓을 사실적으로 연기했다. 사진 카트

쌈닭 기질이 있나.
“꼭 그렇진 않아도 내가 맏이라서 동생들을 보호해야 했다. 자랄 때 대장 노릇을 좀 했다(웃음).”

희생적인 어머니 밑에 자랐다는 게 당신 연기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나.
“(골똘히 생각하다) 엄마의 영향보다는 사실은 내 기질이 좀 희생하는 걸 좋아한다. 남들이 좋아하면 내가 좀 불편한 건 기분 좋게 감수하는 편이다.”

승부 근성에 대해선 어떤가.
“하하하. 내 형제자매들이 좀 밝다. 집에선 미스코리아 봉 들고 같이 춤추고 놀지만, 밖에 나가면 또 넘치는 행동은 안 한다. 해야 하는 건 끝까지 열심히 하는 편이지만, 아닌 것 같으면 되게 빨리 포기한다.”

김지운·최동훈 감독과 ‘장화 홍련’과 ‘범죄의 재구성’을 한 이후론 무엇이 달라졌나.
“‘장화 홍련’의 새엄마와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 스톤이라는 옷을 입을 때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캐릭터가 사는구나… 그동안 영화계가 정말 세련돼졌네(웃음). 내가 1992년 ‘재즈바 히로시마’로 데뷔했다. 일본 사람으로 나왔는데, 당시에 미스 인터내셔널에 나가야 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이 더빙했다(웃음).”

애초에 신비한 이미지나 부러 감출 만한 패를 쥐어 본 적이 없는 그녀다. 키 큰 고양잇과 여배우가 도도한 몸태를 지우고 마트 계산원으로 출연했던 2014년 영화 ‘카트’는 그녀에게 또 다른 도전이자 반전이었다.

캐셔 유니폼을 입고 파마머리를 찰랑거리며 물건을 나르고 바코드를 찍던 염정아, 군소리 없이 연장근무를 하다 해고된 후, 거리에서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이던 악바리 염정아는 대치동 학원가를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던 2019년의 염정아와 다르지 않았다.

나이 먹으니 이제 ‘구로동 샤론 스톤’ 같은 연기는 못 하겠노라고 했다. 새 영화 ‘뺑반’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경찰 역할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 감독은 잘했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도 스스로는 ‘멋있는 척하기’가 쑥스러웠노라고. 그가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쑥스럽다’였다. 칭찬받는 것도 멋있는 척하는 것도 쑥스럽긴 매한가지라고. 그 자신, 엄마로 살아가고 있으니 ‘보통 엄마 역할이 가장 자연스럽지 않겠냐’고. 이젠 치명적인 멜로 같은 건 절대로 못 하겠다고 정직하게 엄살을 떠는 염정아.

배우로서 염정아만의 매력은 뭔가.
“내가 표정이 정말 많다. 생각과 감정이 여러 느낌의 얼굴로 배어 나온다. 배우로서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배우를 좋아했나.
“줄리아 로버츠. ‘귀여운 여인’에 나올 때부터 정말 좋아했다. 줄리아 로버츠가 하면 어떤 드라마도 다 진짜 같고 몸에 확 와닿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연기하고 싶다. 송강호 선배는 최고다. 김윤석 선배도 우러러보곤 했는데, 첫 연출작 ‘미성년’에 감사하게도 나를 아내로 캐스팅해주셨다.”

운이 안 풀린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했나.
“가족들하고 지지고 볶았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면서, 일에 대한 애절한 마음도 유지했다. 그러면 지금처럼 바쁠 때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더라(웃음).”

자존감이 높아질 때는 언제인가.
“연기로 칭찬받을 때 가장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리고 자고 있는 애들을 (손을 높이 들며) ‘와! 키가 이렇게 크네’ 하고 만져볼 때. 내가 애들을 낳고 키우고 있다는 게 매우 자랑스럽고 좋다.”

꽃봉오리가 터지듯 아이들만 생각하면 환희에 찬 표정을 감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엄마를 뭐라고 하나.
“웃긴 사람이라고. 재밌는 사람이라고. 내가 하는 몸짓을 보고 많이 웃는다. 어디 가서 너희들도 쑥스러워하지 말라고, 내가 앞서서 막 몸개그를 한다. (좋아 죽겠는 표정으로) 딸은 커서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큰 애가 글을 잘 쓴다. 상상력도 풍부하고.”

행복한가.
“참 이상한 게, 나는 자주 행복하다.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낀다. 애들과 남편을 보면 행복하고 연기 잘될 때 행복하고, 좋은 대본 볼 때, 맛있는 거 먹을 때, 친구와 깔깔거리며 전화 통화할 때 눈물 나게 행복하다.”

스트레스가 몰려올 땐 어떻게 하나.
“남편과 와인을 마신다. 내겐 소중한 힐링 타임이다. 애들 얘기, 영화 얘기, 인생 얘기 두루두루 다 나눈다.”

대체 가족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으면 저렇게 화사해질 수 있을까. ‘여배우는 꽃’이라는 환상을 깨고 잡초와 잡초 아닌 것의 구분 없이 오직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을 꽃피운 여자. 샤론 스톤이 아니라 ‘구로동 샤론 스톤’으로, 캐슬의 여왕이 아니라 ‘아갈머리 미향’으로. 팜므파탈이든 생존형 아줌마든 어쩌면 염정아가 지닌 힘과 매력은 이토록 지치지 않고 충전되는 ‘자기 충족성’에서 나왔을 것이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SKY 캐슬’에서 나온 후 당신은 어떤 교훈을 얻었나.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한서진을 보면 그녀의 과함 때문에 불행이 생기고 많은 사람이 괴로워했잖나. 교육 문제도 한 사람의 겉과 속을 더 찬찬히 들여다보고 자기만의 중심을 지켜가야 한다.”

28년간 스포트라이트가 없을 때도 그녀가 세트장 어디에선가 계속 연기 중이었다는 게 고맙다. 염정아는 “남들이 나더러 잘 안 풀린다고 할 때도 나는 몰랐다”며 “방송국 오가면서 나이 드신 연기자 선생님들 곁에서 좋은 말씀 들으며, 그 울타리 안에서 연기하는 게 그냥 좋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