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자는 “내 연기가 사람들의 지친 삶에 바늘 끝만큼의 빛이라도 비춰주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사진기자
배우 김혜자는 “내 연기가 사람들의 지친 삶에 바늘 끝만큼의 빛이라도 비춰주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 이태경 조선일보 사진기자

‘늙어버린 몸에, 늙지 못한 마음은 어떻게 적응할까?’.

전통적인 ‘타임슬립(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드라마인 줄 알았던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머릿속에 펼쳐진 환각이라는 역대급 반전으로 놀라운 감동을 안겼다.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꾼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꾼 건지’라는 한마디가 이토록 구체적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대본이 정확하게 김혜자라는 육체를 통과했기 때문이리라.

드라마가 막을 내린 다음 날 김혜자를 인터뷰했다. 누에고치가 명주실 뽑아내듯 꿈꾸는 듯한 얇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를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준 이 드라마를 하늘나라의 남편에게 주고 싶어요.” 그 말은 드라마 속에서 젊은 날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혜자’의 그리움과 겹쳐져 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인터뷰 내내 완급 조절이 정확한 그녀의 목소리는 거미줄 위의 이슬처럼 촉촉하게 떨렸다.


“드라마가 나예요”라며 인터뷰를 여러 번 거절했다. 자연인 김혜자가 드라마 속 ‘혜자’를 보는 기분은 어땠나.
“맘이 많이 아파서 울었다. 그런데 울면서도 생각했다. 요즘 사람들, 많이 힘든데 내 연기가 쪼끔이라도 사람을 위로해주면 좋겠다. 많이 울면 맘이 순해진다잖나.”

김석윤 PD도 이남규 작가도 대단한 게 ‘김혜자’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참 오래 관찰하고 연구했다 싶었다. 그걸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와 섞어서 알맞은 타이밍에 선물처럼 안겨줬다.
“나는 그 사람들을 믿었다. 처음엔 주변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김혜자가 왜 저런 진부한 타임슬립 드라마를 하나…’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오해할 테면 해라.’ 이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웃음). 이젠 슬픈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때가 된 거다. 우는 건 첨부터 노상 울고, 심각한 건 내내 힘주고… 그건 옛날 연기잖나. 내가 배운 건 힘을 뺄 때 정말 좋은 게 나온다는 거다.”

힘을 빼고 한 이야기 중에 어떤 게 기억에 남는가.
“등가교환 이야기 할 때. 영수(손호준 분)가 자고 있을 때 채팅방에 들어가 ‘잉여 놀이’하는 젊은이들하고 댓글로 얘기하잖나. 그땐 정색하고 말하면 안 된다. ‘(한달음에)니네들 그렇게 살다가 나처럼 된다~’ 그 말을 장난처럼 툭 던지는 거다. 무방비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졸고 있다가 잠결에 들을지도 모르잖나. 난 그 장면 대사를 한 100번쯤 연습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게 실감난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 내 귀중한 걸 희생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 그게 등가의 법칙이다. 운 좋은 사람? 운 좋았다 해도 노력 안 하면 사라진다. 나는 이해력도 부족한 사람이라 열심히 안 하면 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꿈에서도 대본이 나왔을까.”

타임슬립의 전통 서사에 코미디를 섞고, 배우 개인의 역사에 노년의 신화를 매끄럽게 이어내는 것은 김혜자가 성취한 연기적 마술이다. 마지막에 이르면 김혜자는 자기보다 한층 더 늙은 상태를 연기한다.

햇빛에 바랜 머리카락, 비바람에 녹슨 것 같은 피부, 자아가 이탈한 눈… 머루처럼 까만 눈 안에 순식간에 번개가 치고 별빛이 일렁이며 청춘과 노화의 시간이 오갈 때, 그 눈빛의 속도가 실제 빛의 속도를 추월해 우리를 설득해 버리곤 했다.

나이 들면 윤곽이 흐릿해진다지만, 연기할 땐 좋은 점이 더 많지 않을까.
“나이 먹으면 인중도 길어지고 콧구멍도 커진다(웃음). 나이 먹으면 언제든 드러날 건 드러나게 돼 있다. 숨기는 게 없으니 훨씬 자유스럽다. 이번엔 촬영할 때 카메라가 얼굴을 밑에서 잡으니, 콧구멍이 무슨 터널처럼 크게 나왔다. 시청자들도 댓글로 ‘콧구멍 크다’고 타박하더니, 이젠 또 ‘너도 나이 먹으면 살이 얇아져 콧구멍 커진다’ 이러면서 서로 반성도 하고 야단도 치더라. 그걸 보면서 나는 또 ‘이 사람들이 참 다정도 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만 늙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알 것 같다.
“정말로 나이 먹으면 어떤 일이 어제 일처럼 확 줌인이 된다. 어떨 땐 지금, 이 순간도 아스라하게 줌아웃이 되고.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대사를 할 때 ‘아, 작가도 이걸 느꼈구나’ 했다. 그게 나다. 간혹 ‘진짜 배역을 사는 거 같아’라는 댓글을 볼 때마다 혼자 중얼거렸다. ‘같아’가 아니라 ‘그게 나예요’라고.”

어쩌면 그 힘으로 선생은 드라마에서도 자기 인생에서도 주인공으로 살아온 게 아닌지.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날개는 누가 달아 주지 않는다. 내 살을 뚫고 나오는 거다. 등가교환과 비슷한 말이다. 깃털이 살을 뚫을 때 얼마나 아프겠나.”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가족들이 배려해줘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꿈꾸듯이 살아온 인생이다. 큰아들이 네살 때 연기를 재개했으니 오랫동안 ‘국민 엄마’로 불렸지만, 그 모든 게 허물을 덮어준 자식과 남편의 공이었노라고.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를 연기한 한지민과 김혜자(오른쪽). 김혜자는 “너무 예쁜 사람이 자신의 젊은날을 연기해줘 고맙다”고 했다. 사진 JTBC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를 연기한 한지민과 김혜자(오른쪽). 김혜자는 “너무 예쁜 사람이 자신의 젊은날을 연기해줘 고맙다”고 했다. 사진 JTBC

엄마 김혜자는 어떤 사람이었나.
“같이 있다가도 ‘엄마 공부해야 해. 대본 봐야 해’ 하고는 방에 들어갔다. 우리 아들이 그러더라. ‘엄마가 방에 들어가서 공부할 땐 곁에 가면 안 될 것 같았어. 무슨 커튼이 드리워진 것처럼.’ 난 그 말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 난 연기를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젠 ‘혜자’라는 이름이 가족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나도 ‘혜자’가 좋다. 내 이름이니까. 은혜 혜(惠) 자를 쓴다. 우리 언니 둘은 자(子) 자 돌림이 아닌데, 내 이름만 왜 그렇게 지으셨나 몰라(웃음). 김석윤 감독이 드라마 ‘청담동 살아요’ 할 때도 주인공을 ‘혜자’로 쓰더니, 이번 드라마에도 또 ‘혜자’다(웃음).”

연출자와 작가들에겐 ‘김혜자’라는 존재 자체가 탐구 대상인 듯하다. 익숙했던 ‘혜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수록 불가사의한 생의 풍경이 펼쳐지니까. 계속 호기심이 생기는 게 아닐까. 봉준호 감독도 영화 ‘마더’에서 주인공 이름을 ‘혜자’로 썼잖나.. . ‘국민 엄마’를 비틀었더니 짐승처럼 스산한 모성의 여자가 나왔다. 그런데 7세 때 출연한 연극에서도 ‘혜자’였다고 들었다.
“그랬다. 개에 물려 공수병으로 죽는 아이였는데, 앓다가 죽어가니까 관객들이 ‘혜자를 죽이지 말라’고 아우성을 쳤다고(웃음). 그때 우리 언니가 ‘이 아이는 배우가 될 싹’이라고 했다더라.”

7세 혜자부터 70대의 혜자까지… 여러 역할로 우리 곁에 있었는데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쌓아 올린 이미지를 해체하고 역전시키는 재미를 느끼나 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좋은 사람들이 때가 되면 불러주는 거지. 내가 41년생, 한국 나이로 78세다. 옛날 같으면 굉장히 오래 산 거다. ‘왜 이렇게 오래 사나’ 싶을 때도 많다. 생각해보면 ‘눈이 부시게’의 혜자 역할도 이 나이니까 할 수 있었던 거잖나. 김석윤씨가 기다렸을 거다. 더 나이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딱 이 나이가 될 때까지(웃음).”

창작자들이 선생의 이전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아 영감을 발전시킨다는 느낌도 받는다.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의 희자도 알츠하이머였다.
“나는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안 잊히는 장면이 있다. 상대역인 주현씨한테 ‘나 잠이 안 와’ 그랬더니 자장가로 ‘서머타임’을 불러주잖나. (배시시 웃으며) 나, 그때 정말 좋았다. 치매가 깊어도 사랑이 구원하는구나. 사랑만이 답인 거다. 요양원에서 주현씨가 옆에서 퍼즐 조각 맞춰줄 때도 그 여자는 산만하게 딴 데 보면서 다른 사람 간섭을 한다. 치매에 걸리면 그냥 아기인 거다.”

치매 노인의 머릿속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궁금하다 했는데 이번 작품이 그 답이 됐겠다.
“옛날부터 몹시 궁금했다. 치매 걸리면 뇌가 쪼그라든다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가. 달나라에도 갈 만큼 기술이 좋아졌다는데 왜 그걸 못 푸나? 예전에 파키스탄 지진 현장에 가면 볼품없는 천막은 가만 있는데 튼튼하게 지은 2~3층 건물들이 뒤집어져 있더라. 그거 보면 땅속에 커다란 손이 막 헤집고 다닌 것 같다. 치매가 그런 걸까. 하버드대 교수 생활 하다 치매 걸린 여자도 어느 날 대학 광장에서 황망해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이 안 나는 거다.”

살아보니 어떻던가.
“나는 그냥 오롯이 그 시간을 살았다. ‘혜자’라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서민이지만 다정했던 여자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아이 하나 낳고 알콩달콩 살았는데 비극의 현대사 속에서 남편을 잃는다. 살면서 그 여자는 돈이 제일 무서웠다. 열심히 살다 좀 살만하니까 치매에 걸린 거다. 참 다행인 건 일평생 그 여자는 마음 밭이 좋았다는 거.”

마음 밭이 좋았던 드라마 속 ‘혜자’처럼 김혜자도 그렇다. 그녀는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30년째 봉사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품에 안은 아이가 당신 몸에 새겨진 검은 문신 같다고 했다.

집 밖에 나가기 힘들어하는 기질인데 어떻게 매번 아프리카를 갈 수 있나.
“그러니 감사하다. 남들은 경비행기 타면 심장이 툭툭 떨어져서 구토를 하는데, 나는 안 그렇다. 몸은 약해도 하나님이 튼튼한 오장육부를 주셨다. 비행기가 흔들릴 땐 앞에 있는 계기판을 보고 ‘저렇게 요동을 치네’ 그런다. 조종사 등 보면서 ‘아! 저 사람, 참 외롭겠구나’ 하면 어느새 다 와있더라고.”

못다 이룬 꿈이 있나.
“꿈? 난 그런 거 몰랐다. 꿈이 뭔지 모르고 살았다. 누군가 내가 할 걸 보여주면 그걸 하며 살았다. 가끔 이런 생각은 했다. 영화 ‘길’의 젤소미나 같은 역할은 해보고 싶다고. ‘내 사랑’의 몸이 아픈 화가 모드 역할도 좋았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보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 모든 허물을 사랑이 다 덮는다.”

이어 기습하듯 말했다. 어쩌면 이번 드라마가 김혜자의 마지막 챕터가 될 거라고. “100세 시대지만 임무가 끝나면 하나님이 데려간다고 해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마지막 챕터가 아닌가 해. 잘 여미게 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챕터에서 선생이 찾은 건 무엇인가.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치매라고 하면 며느리가 밥 안 줬다고 악을 쓰는 노인만 봤잖나. 살아보니 제일 아름다웠던 순간도 가슴 아팠던 순간도 다 소중하게 모여 기억이 된다. 뇌가 쪼그라들어도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으로 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