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데코 쇼룸 맞은편에 있는 닐 바렛 매장. 디자인 위크 기간에 맞춰 쇼윈도를 새로 단장한 패션 매장도 또 하나의 볼거리다. 사진 이미혜
구찌 데코 쇼룸 맞은편에 있는 닐 바렛 매장. 디자인 위크 기간에 맞춰 쇼윈도를 새로 단장한 패션 매장도 또 하나의 볼거리다. 사진 이미혜

17세기 중반 유럽의 상류 사회에선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는 게 유행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생겨난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으로,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가정교사와 하인을 거느리고 2~3년간 유럽 곳곳을 여행했다.

미적 감각을 지닌 교양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체험학습인 셈이었다. 이 용어를 처음 책에 실은 리처드 라셀은 ‘이탈리아 여행(The Voyage of Italy)’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도는 그랜드투어를 다녀온 사람만이 리비우스와 카이사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고대 로마의 역사나 정치엔 관심 없더라도 유럽 전역에서 디자인 박람회가 시작되는 봄이면 한 번쯤 디자인 여행을 꿈꿔볼 만하다. 그 시작은 역시 디자인 수도 이탈리아 밀라노다.

매년 4월이면 밀라노는 예술적 영감과 비즈니스를 위해 도시를 찾은 전 세계 사람으로 활기를 띤다. ‘살롱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로 불리는 가구 박람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34만5000㎡에 달하는 피에라(Rho Fiera) 전시장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구 전시회에서 비롯된 이름이지만, 디자인 위크 기간에는 도시 전체가 축제의 장이다. 거리의 디자인 쇼룸과 갤러리는 사무실을 개방해 방문객을 맞이하고, 소규모 콘서트와 퍼레이드, 팝업 전시도 열린다.

대부분의 전시는 무료이며, 인테리어 디자인과는 무관한 패션 매장이나 음식점도 상점 전면을 이색적으로 장식해 사람의 발길을 끈다. 올해는 4월 9일부터 14일까지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열렸다. 2월 말 패션 위크 기간에 밀라노를 방문했을 때보다 도시는 훨씬 들떠 있었다.

게다가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롯해 유럽에서 열리는 어떤 미술 축제보다도 볼거리가 풍성했다. 월페이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토니 챔버스는 “패션 위크는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디자인 위크는 그 이상이다”라며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창작의 형식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디자인과 패션, 혹은 디자인과 예술, 디자인과 기술의 만남은 새롭고 다른 표현의 형태를 창조한다. 그것은 가구나 오브제 같은 설치물이 될 수도 있고,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4차원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사실 밀라노 디자인 위크만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대규모 리빙페어를 연상시키는 피에라 밀라노 박람회보다 장외 전시 격인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를 찾아야 한다. 밀라노 쇼핑의 중심지인 몬테 나폴레오네와 브레라 그리고 우리나라의 홍대나 성수동 같은 람브라테 지역, 나빌리오 운하가 있는 토르토나 등에서 전시가 진행되는데, 폐공장과 옛 기차역, 유서 깊은 대저택 등을 전시장으로 활용해 공간 자체만으로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삼성, LG 등 한국 기업의 전시장이 몰린 토르토나 지구다. 산업화 시대부터 1960년대 말까지 약 100년간 밀라노를 대표하는 공업 지역으로 유명했던 토르토나는 중동 오일쇼크와 생산 체계의 변화로 한때 폐허처럼 변한 우범지대였다.

이 지역이 문화·예술 중심지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건 상대적으로 싼 임대료 덕분이었다. 1980년대 이탈리아 유명 패션 잡지 편집장과 사진 작가 등이 옛 샹들리에 제조공장 등을 개조해 이곳에 ‘수퍼 스튜디오’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었고,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아르마니, 펜디, 제냐 같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의 쇼룸도 들어섰다.

아르마니는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맞춰 토르토나 지구 내 ‘Armani/Silos’에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 전시 ‘The Challend’를 오픈했다. 안도 다다오가 옛 공장의 특성을 살려 재건축한 맞은편 아르마니 쇼룸에서는 디자인 위크 동안 아르마니의 전시가 진행됐다. 수퍼 스튜디오에서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주관으로 ‘수묵의 독백’ 전시회가 열렸다.

예술감독을 맡은 패션디자이너 정구호는 통도사의 방장 성파 스님의 옻칠 작품을 비롯해 흑과 백의 공예 작품으로 책가도와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공간을 연출했다. 한국적이면서도 모던하고, 전통의 무게감을 살려 지금까지 열린 ‘한국 공예의 법고창신’ 전시 시리즈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벤추라 센트랄레 지역의 노루페인트 부스도 관람객의 행렬이 늘 길게 이어진 인기 전시였다. 밀라노 중앙역 옆에 있는 벤추라 센트랄레는 버려져 있던 거대한 창고를 전시장으로 활용한 프로젝트로 2017년부터 시작됐다. 단 10여 개 브랜드만 참여할 수 있어 경쟁이 치열한데, 부스별 공간이 둥근 터널 형태인 데다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노출돼 있어 마치 동굴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발한 콘셉트의 전시도 눈길

노루페인트는 컬러 전선과 PVC 호스로 가구를 만들어온 이광호 작가, 덴마크 디자이너 듀오 ‘Wang & Söderström’과 협업해 둥근 달이 뜬 계곡의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빛의 마술사 올라퍼 엘리아슨의 미술 작품 ‘황금 태양’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공간에는 100개의 이클립스 스툴이 전시됐다. 인상적인 건 페인팅 대신 빛을 이용해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하지만 벤추라 센트랄레 지역의 최고 스타는 역시 프라이탁이었다.

리사이클링 브랜드로 유명한 프라이탁 전시장은 최소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할 정도로 종일 붐볐다. 스위스 아티스트 게오르그 렌도프가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설치물(하얀 실로 만든 입방형 구조물로 자연 풍경을 연상시키는 영상이 투사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관람객은 그 무수한 실 사이를 걸으며 작품의 일부가 됐다)도 멋있었지만 전시 콘셉트 자체가 기발했다. 프라이탁은 나쁜 디자인과 잘못된 소비에 대한 참회를 유도했다. 모두가 멋지고 화려한 디자인을 자랑하기 바쁜 이 디자인 축제에서 말이다.

관람객은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다 고해성사 박스에 번호가 뜨면 그 안에 들어가 자신의 죄를 말하고, 그 앞에 놓인 초록색 종이에 자신의 죄를 그린 후 판사에게 승인 도장을 받는다. 죄 사함의 선물은 바로 잉크젯 프린터 건을 활용한 프라이탁 에코백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아직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알코바(Alcova)였다.

지금 가장 힙하고 트렌디한 디자인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고 보면 된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알코바 프로젝트는 빵 공장을 개조한 로레토(Loreto) 북부 지역과 캐시미어 공장을 개조한 사세티(Sassetti) 지역으로 두 개의 사이트가 나뉘는데,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라난 나무와 식물들, 황폐하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이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기에는 21세기의 새로운 디자인 흐름을 만들어가는 40여 개의 전위적 디자인 업체가 모였다. 각각의 공간은 크지 않지만, 현대 미술에 가까운 전시 방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텅 빈 공간에 농담처럼 툭 던진 시멘트 의자, 타일을 소재로 한 조명, 사물이 아닌 풍경을 감쌀 만큼 강력하고 넉넉한 포장 테이프 등 신선한 디자인 제품들이 미로 같은 공간마다 이어졌다.

내년에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시작으로 그랜드투어를 떠나보면 어떨까. 그 옛날의 유럽 귀족처럼 배와 마차를 번갈아 타는 수고스러움은 줄었다. 우리에겐 비행기와 기차가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돈과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전 재산을 쏟아부을 정도는 아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찬란한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일생에 한 번뿐인 여행’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 이미혜
패션·미술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보그코리아 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