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빌(앤서니 홉킨스·오른쪽 사진의 왼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전(클레어 포를라니·왼쪽 사진의 왼쪽), 그런 수전이 죽음 그 자체(조 블랙·브래드 피트·각각 오른쪽)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빌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사진 브래드 피트 웹
주인공 빌(앤서니 홉킨스·오른쪽 사진의 왼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전(클레어 포를라니·왼쪽 사진의 왼쪽), 그런 수전이 죽음 그 자체(조 블랙·브래드 피트·각각 오른쪽)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빌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사진 브래드 피트 웹

“옛날 옛날 어느 왕국에 어진 임금님이 살았어. 왕에게는 두 가지 걱정이 있었지. 호시탐탐 왕국을 노리는 이웃 나라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작은 딸이 멋진 왕자님을 만나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이제 갈 때가 되었노라, 하고 임금님 앞에 저승사자가 나타난 거야.”

어른을 위한 동화다. 왕국의 임금님 대신 기업의 회장님이 나오고 검은 삿갓 쓴 무시무시한 저승사자 대신 30대의 브래드 피트가 해맑은 얼굴로 양복 쏙 빼입고 나온다. 무력침략으로 왕국이 무너지는 대신 경쟁 회사에 강제 매각하여 한몫 잡으려는 세력의 음모로 회장은 졸지에 경영권을 잃고 쫓겨난다. 설상가상 그토록 사랑하는 작은딸은 하필이면 그를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잠시 빌려 쓰고 나타난 저승사자와 사랑에 빠진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우리들의 회장님은 뒤죽박죽, 인생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고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한 편의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직업에 싫증이 난 저승사자라는 뜻밖의 설정이다. 영겁의 세월을 살며 수천 년간 똑같은 일을 반복해왔다는 저승사자는 그야말로 지루하고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다. 그리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저승으로 데려가려 할 때면 인간이 왜 그토록 아쉬워하는지, 대체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그는 직접 느껴보고 싶은 호기심에 빠진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젊은 남자의 몸을 빌려 입고 예순다섯 살 생일을 앞둔 윌리엄(빌) 패리시 회장 앞에 나타나 말한다. “내게 세상을 보여줘, 날 안내해 줘, 그럼 대가로 시간을 주지.”

폐부를 찌르는 아픔을 느끼기 전까지 타인의 고통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 태어나고 죽는 것만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평등이라지만, 닥치기 전까지 죽음을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죽음이 눈앞에 실체를 드러냈을 때, 너무나 분명하고 확고하게 이제는 생을 마감해야 할 때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될까.

언제부턴가 죽음을 예감해왔던 빌은 거부할 수도, 미룰 수도, 취소할 수도 없다는 걸 인정한다는 듯 저승사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정체를 궁금해하는 가족 앞에서 ‘조 블랙’이란 이름을 얼렁뚱땅 지어준 빌은 그날부터 죽음과 함께 한 집에서 자고 먹고, 같이 출근하며 회의에도 나란히 참석한다. 영문을 모르는 회사 사람들은 빌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되는데 이것이 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점점 난처해지는 빌의 입장과는 달리 인간의 눈과 귀와 입과 손으로 세상을 배우게 된 조는 소풍 나온 아이처럼, 난생처음 테마파크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소년처럼 모든 경험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에게 가장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였다. 그는 가정과 회사에서 빌의 생활을 가까이 지켜보며, 그가 평생 이루려 했던 꿈과 노력과 아쉬움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번개처럼 찾아온 사랑.

빌의 저녁 식탁에 앉아 있던 조는 퇴근하고 돌아온 수전이 자신을 보고 놀라는 이유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곧 그의 모습이 그녀가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만나 호감을 느꼈던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는 훤히 아는 저승사자도 자기가 언제,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는 모양이다.

패리시 회장은 저승사자가 인생 체험을 믿고 맡길 만큼 썩 괜찮은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이 세상에 좋은 걸 남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젊음과 일생을 바쳐 회사를 키워왔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그동안 지켜온 긍지와 명예를 팔 생각이 없는, 소신 있는 기업인이다. 무엇보다 빌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로맨티스트다.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난 순간, 그녀가 입었던 옷의 모양과 색깔은 물론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기뻐 뛰었는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남긴 두 딸을 아끼고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수전이 죽음 그 자체와 사랑에 빠지다니. 빌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삶과 죽음은 원래 하나다. 삶은 죽음에서 나오고 죽음은 다시 삶으로 돌아간다. 몇 날 며칠 함께 지내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조는 빌이 쌓아온 인생의 의미가 산산조각 나지 않도록 힘을 보탠다. 빌 또한 가슴이 아프더라도 조를 통해 수전이 진실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마침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 조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쩌면 영원한 세월 속에서는 불가능했을 우정과 사랑, 유한한 인간의 삶이 조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을지 모른다. 그제야 조는 깨닫는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세상 떠나는 걸 아쉬워했는지를. 그런 조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사랑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조와 함께 이승을 떠나야 하는 빌은 담담히, 인생 선배답게 이야기한다. “떠나보내는 게 쉽진 않지. 그게 인생이라네.”

달콤쌉싸름한 판타지 멜로드라마로 알려져 있지만 인생을 좀 아는 관객에게는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래? 하는 질문이 가슴을 쿡 찌르는 영화다. 꿈을 위해, 사랑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3시간의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저승사자라니 말도 안 돼, 세상에 빌과 같은 멋진 인생이 어디 있어? 의심하는 대신, 속는 셈 치고 믿어보면 어떨까, 혹시 누가 알까. 어느 날 문득 잘생긴 저승사자가 나타나 내 삶에 감동했다며 보너스를 줄지.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아이는 크리스마스 날 아침, 부모님이 준비한 선물을 받는다.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아이만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다. 여성 팬이라면 젊은 브래드 피트의 모습에 눈이 황홀할 것이다. 상대역인 클레어 포를라니의 지적인 미모도 남녀 할 것 없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패리시 회장을 연기한 앤서니 홉킨스의 무게감이 작품의 균형을 훌륭히 잡아준다. 시각장애를 가진 퇴역장교(알 파치노)와 소년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담았던 ‘여인의 향기’를 연출한 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작품이다.

행복이란 조가 처음 맛보고 반해버린 땅콩버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가깝고 너무 흔하고 너무 당연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 바로 여기, 우리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빌의 생일 파티,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과 함께 연주되는 ‘What a wonderful world’와 마지막 스크롤이 올라가며 흘러나오는 하와이언 풍의 ‘Somewhere over the rainbow’가 주는 여운도 절대 놓치지 말 것.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조 블랙의 사랑 (Meet Joe Black, 1998)

장르|판타지·미스터리·멜로
국가|미국
러닝 타임|178분
감독|마틴 브레스트
출연|브래드 피트(조 블랙), 앤서니 홉킨스(윌리엄 패리시), 클레어 포를라니(수전 패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