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등장한 르노 도핀은 프랑스 패밀리카로 인기가 많았다. 사진 르노삼성자동차
1956년 등장한 르노 도핀은 프랑스 패밀리카로 인기가 많았다. 사진 르노삼성자동차

한국에서 프랑스 차라고 하면 ‘디젤 엔진을 탑재한 강력한 연비를 가진 차’ 정도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연비는 거들 뿐, 그들만의 색채와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보편화한 유압식 브레이크와 클러치를 가장 먼저 만든 곳도 프랑스이고, 최초의 레이스가 열린 곳 역시 프랑스라는 점을 생각하면 프랑스 차는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홀대받고 있을지도 보른다.

세계 최초의 자동포탑을 만든 르노, 디자인의 혁신을 가져온 시트로엥(DS), 철공소에서 시작해 프랑스 국민차로 불리는 푸조까지…. 이들이 걸어온 역사만 나열해도 책 몇십 권쯤은 가뿐하지 않을까.

파리가 배경인 영화를 보면 어김없이 프랑스 차가 등장한다. 프랑스 차가 등장하는 영화는 늘 독특한 색감과 예술적인 터치, 그 안에 묻어 있는 사소한 디테일까지 어느 한 곳 튀지 않는 조화로움으로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차가 가장 돋보였던 영화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에릭 바나 주연의 ‘뮌헨’을 꼽고 싶다. 영화는 이스라엘 첩보 기관이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곳곳에 숨어있는 테러리스트를 찾아내 암살하는 내용인데, 1970년대 당시 거리 재현이나 소품 사용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자동차 배경을 빼놓을 수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피아트와 알파 로메오, 란치아가 한 앵글에 잡히기도 하고 프랑스에서는 르노를 비롯해 푸조, 시트로엥 등이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프랑스 정보원인 루이가 타고 등장하는 네이비 컬러의 시트로엥 DS다. 비가 내린 파리 시내나 파리 외곽 비포장도로를 우아하게 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지금은 시트로엥에서 DS를 따로 분리해 관리하고 있지만 DS는(원래는 모델명) 여러 가지 의미로 20세기 자동차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모델이다.

푸조가 등장하는 영화로는 뤼크 베송 감독의 ‘택시’ 시리즈가 유명하다. 프랑스의 국민 브랜드답게 푸조는 일상생활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영화는 ‘택시’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병헌이 출연했던 영화 ‘레드2(한국 개봉 제목은 ‘레드: 더 레전드’)’의 파리 추격전에서는 바이크를 쫓는 포르쉐911 뒤를 따라 시트로엥 2CV가 좁은 골목 골목을 누빈다. 이 밖에도 007 시리즈 등 다양한 영화에서 프랑스 차는 소소하지만 익살이 가득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로 나온다.

유럽에서 자동차 종주국을 논할 때엔 항상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 앞다퉈 나온다. 이탈리아는 자동차의 기원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든 태엽 자동차에 둔다. 프랑스는 포병 장교였던 니콜라 조제프 퀴뇨가 만든 증기차를 들고나온다. 독일은 카를 벤츠가 만든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내세우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비해 등장 시기가 늦다.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현재 공인되는 최초의 휘발유 엔진 자동차인 것은 맞다. 이에 대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반응은 ‘우리는 훨씬 이전부터 비슷한 것이 있었어. 다만 특허를 내지 않았을 뿐’ 정도의 반응이랄까. 이 중 공식적인 최초의 자동차로 인정받는 차는 바로 프랑스의 퀴뇨가 만든 증기차다. 그만큼 자동차 역사에서 프랑스가 갖는 위치나 역할, 족적은 생각보다 크다.

우선 프랑스 차는 철저하게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이런 경향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프랑스 차는 배기량을 늘리거나 높은 출력을 선호하지 않는다. 혹자는 프랑스 차의 숫자만 보고 ‘기술력이 없어서’라고 비아냥대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맞다.

실제로 최초의 모터스포츠 이벤트도 프랑스에서 열렸다. 또 장 알레시와 알랭 프로스트 같은 걸출한 F1 스타, 최근 WRC를 휩쓸고 있는 세바스티앵 오지에, 월드 챔피언 9회를 기록 중인 WRC의 살아있는 전설 세바스티앵 로브 같은 드라이버들은 모두 프랑스 자동차 회사와 함께 역사를 만들었다.


시트로엥 2CV는 애완견과 같은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원래 개발 콘셉트는 ‘농부들을 위한 차’였다. 사진 황욱익
시트로엥 2CV는 애완견과 같은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원래 개발 콘셉트는 ‘농부들을 위한 차’였다. 사진 황욱익
생활용품을 만들던 철공소에서 시작한 푸조는 부가티의 의뢰로 섀시를 만들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났다. 사진 황욱익
생활용품을 만들던 철공소에서 시작한 푸조는 부가티의 의뢰로 섀시를 만들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났다. 사진 황욱익

우리가 몰랐던 자타공인 자동차 종주국

시트로엥이 만든 트락숑 아방(1934~56년)이나 2CV(1948~98년), 푸조의 2시리즈(1929년~현재), 르노의 4CV(1947~61년)나 도핀(1956~67년) 같은 소형차들에는 프랑스 서민의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다. 실제 유럽 판매량 1위부터 10위까지는 대부분 소형차들이다. 한국처럼 중대형 승용차가 많이 팔리는 기형적인 모습은 볼 수 없다.

특히 시트로엥 2CV 같은 경우는 개발 콘셉트 자체가 재미있다. 비포장도로가 많은 농경 국가인 프랑스 농부들이 내리고 타기 편하도록 천장이 높은 독특한 구조를 택했다. 여기에 달걀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달려도 깨지지 않을 정도의 서스펜션을 채택한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프랑스 차라고 하면 ‘작고’ ‘잘 달리고(빠른 것과는 다르다)’ ‘특유의 움직임과 재미있는’ ‘핸들링을 가진’ 등의 특징이 꼽힌다.

커피 그라인더와 후추통, 농기구, 자전거, 심지어 포탄과 라디오까지 만들던 동네 철공소에서 시작한 푸조는 프랑스 차의 핸들링을 가장 잘 설명하는 독보적인 회사이기도 하다. 흔히 고양이 발바닥이라 불리는 푸조의 서스펜션은 평지에서는 승차감 중심의 부드러움을 선사하지만 코너가 나타나면 마치 발톱이 나오는 것처럼 차체의 자세를 잡아 준다.

또한 디자인 분야에서도 프랑스 차는 독창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투박한 미국 차, 엔지니어링에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독일 차에 비해 프랑스 차의 디자인은 감각적이고 세련됐으며, 구석구석에 그들이 가진 유머와 해학이 살아 있다.

프랑스 차는 전쟁과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철저하게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혹자는 프랑스 차의 이런 특징에 대해 새로운 기술에 인색하고 기술 개발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히려 프랑스 자동차 제조사들은 ‘그렇게 안 해도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이들이 나태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랑스 차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