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사진 위키피디아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사진 위키피디아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기본적인 송가
파블로 네루다 지음|김현균 옮김|민음사
432쪽|1만6000원

파블로 네루다(1904~73)는 칠레의 시인이었지만, 사실상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문학 전체를 대표한 시선(詩聖)이었다. 네루다는 일찍이 스무 살에 발표한 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그 이후 화려한 문필 활동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정치적 모험을 펼치면서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그는 낭만적이고 초현실적인 시를 쓰다가 1935년 스페인 내전을 목격한 뒤 진보적 사회의식을 키웠고, 그 이후 칠레 민중을 대변하는 시를 쓴 덕분에 민중의 지지를 얻어 상원 의원이 됐고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자 해외 망명길에 올랐고, 유럽을 무대로 창작 활동을 펼치면서 세계적 시인으로 우뚝 솟았다. 1971년 스웨덴 한림원은 네루다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공표하면서 “기본적 세력의 행동을 통해 한 대륙의 운명과 꿈이 살아있게 하는 시학”을 선정 이유로 꼽았다.

한림원이 언급한 ‘기본적 세력’은 네루다의 시집 ‘기본적인 송가(頌歌)’를 참고해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 네루다가 1954년 출간한 이 시집은 세상의 기본을 이루는 사람과 사물을 예찬한 연작시 모음이다. 기층 민중과 보통 사물이나 자연 현상을 노래했다. ‘공기를 기리는 노래’를 비롯해 ‘엉겅퀴를 기리는 노래’ ‘소박한 사람을 기리는 노래’ ‘땅에 떨어진 밤을 기리는 노래’ ‘여름을 기리는 노래’ ‘책을 기리는 노래’ ‘포도주를 기리는 노래’ 등등.

최근 김현균 서울대 서문학과 교수가 이 시집을 처음 완역해 출간했다. 번역본 제목은 시 ‘책을 기리는 노래’ 중 “책이여,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에서 따왔다. 원제 ‘기본적인 송가’를 부제로 돌렸다. 이 시집의 첫머리는 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장식한다. 시인은 자의식 유희를 탐닉할 게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저 자신을 내세우지 않은 채 보이지 않게 시를 써야 한다고 선언한 것. 네루다는 “그는 너무 커서/ 자기 자신 속에 들어가지 못해/ 엉켰다 풀리기를 반복하고/ 스스로를 저주받은 존재로 일컫네”라며 자의식 과잉에 빠진 시인들을 조롱했다.

이어선 “나의 삶을 위해 모든 삶을 내게 다오/ 온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내게 다오,/내가 그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리니”라며 민중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민중의 희망을 노래하려고 했다. 네루다는 그 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하루하루의 투쟁을 내게 다오,/그것들은 나의 노래이고,/ 그렇게 우린 모두 다 같이/ 어깨동무하고,/ 함께 걸어가리니,/ 나의 노래는 모두가 하나 되게 하는 노래:/ 모든 이들과 함께 부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노래.”

네루다의 시풍은 한국의 민중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네루다의 방대한 시 세계는 단순히 민중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네루다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라면서도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네루다의 시학은 현실뿐 아니라 초현실도 아우르면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특성으로 꼽히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선도했고, “네루다가 손을 대면 모든 것이 시가 된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그의 언어가 인간과 역사 그리고 자연과 우주를 아우르기 때문에 특정 이념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력의 우주를 빚어냈다.

가령, 그의 시 ‘실을 기리는 노래’를 펼치면 “이것은 시의/ 실이다./ 사건들이 양처럼/ 검거나/ 혹은 흰/ 양털을 싣고 간다./ 그것들을 불러라, 그러면 올 것이다/ 경이로운 무리들,/ 영웅들과 광물들,/ 사랑의 장미,/불의 목소리,/ 모든 것이 네 곁으로 오리라”고 외친다. 그는 시를 통해 현실의 모든 기본 요소를 모아서 세계를 직물처럼 짜나간 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