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열매는 눈부신 법.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는 배우 지망생 노라(스칼렛 요한슨·오른쪽)와 충동적으로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집착하는 것일 뿐, 세상을 품에 안겨줄 아내 클로이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사진 IMDB
금단의 열매는 눈부신 법.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는 배우 지망생 노라(스칼렛 요한슨·오른쪽)와 충동적으로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집착하는 것일 뿐, 세상을 품에 안겨줄 아내 클로이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사진 IMDB

“선(good)보다는 운(lucky)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인생을 좀 아는 사람이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화면은 이쪽저쪽으로 오가던 테니스공이 네트를 건드린 후 허공에 떠 있는 모습에서 잠시 멈춘다. 주인공 크리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네트를 건드린 공은 넘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공은 넘어가고 당신이 이긴다. 반대의 경우 당신은 패한다.”

‘매치 포인트’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주연했던 ‘젊은이의 양지’나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그 리메이크작인 ‘리플리’처럼 살인을 해서라도 천국에 오르고 싶은 남자의 이야기다. 테니스 강사 크리스는 한때 프로 선수였으나 운이 나빠 빛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청년이다. 왜 내가 친 공은 네트를 넘지 못할까, 불만 가득한 크리스는 사모님들 공이나 받아주려니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걸 다 가진 상류층 집안의 톰을 만나 호감을 사고 여동생 클로이도 소개받는다. 크리스는 그녀가 성공의 사다리가 되어줄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톰의 약혼녀 노라를 보는 순간 단번에 매혹된다.

금단의 열매는 눈부신 법. 더구나 사람의 마음은 이질적인 대상에게 강렬히 끌리면서도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에 사로잡히면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배우 지망생 노라가 치명적으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자신처럼 가난하고, 자신처럼 성공에 목말라하면서 부잣집 남자를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는 그녀는 어떤 면에서 크리스의 분신이다. 노라와 충동적으로 관계를 갖게 되지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집착하는 것일 뿐, 세상을 품에 안겨줄 클로이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결혼한 크리스는 장인의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던 중, 톰과 헤어진 노라와 우연히 만나 본격적인 불륜관계에 빠져든다. 남을 향해 손가락질하긴 쉽지만 감추어진 사랑, 시한폭탄 같은 연인의 존재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 크리스는 마침내 갖고 싶던 모든 것을 손안에 움켜쥔 것 같은 기분이다. 부와 성공과 안정된 가정 그리고 아름다운 정부까지.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선물을 주려던 행운의 여신이 착각한 것일까. 불임치료까지 받으며 아이를 원하던 클로이 대신 노라가 임신한다. 오디션에서 계속 실패하며 미래를 불안해하던 노라는 크리스에게 클로이와 이혼하고 자신과 함께해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삶은 인간의 양손에 행운을 쥐어주지 않는다. 양쪽 모두 보물이라고 생각된다면 다시 잘 봐야 한다.

저 사람만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저 사람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가면서 한 번쯤,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구라도 무서운 생각을 하는 순간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리질을 한다. 스스로 뿌린 씨앗이니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리라, 용서를 구하고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나아가리라, 쉽진 않지만 떳떳한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제 막 성공의 문턱에 들어선 크리스는 모든 것을 끝장낼 것 같은 노라의 존재가 두려워 멈춰 서지 못한다.

크리스는 수사 과정에서 내연관계가 드러나 의심받지만 다른 살인사건 피해자의 몸에서 알리바이가 되어줄 반지가 발견되는 바람에 혐의를 벗는다. 크리스는 안도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죽였다는 충격으로 당장은 좀 우울하지만 죄의식은 곧 희미해질 것이다. 양심 따위는 꾸깃꾸깃 접어서 마음 깊숙한 곳에 잘 감추어두면 된다. 그러다 보면 노라? 그런 여자가 있었나, 하고 완전히 잊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은 얼마나 자주 악과 거짓이, 불의와 부정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영화를 본 많은 관객도 운 좋은 놈이 이겼군, 하고 일어섰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쯤에서 영화의 첫 장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테니스공이 허공에 멈추어 있던 화면 위로 크리스가 말했다. “공이 네트를 넘어가면 당신은 운이 좋은 것이고 이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진다.”

강도 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조작했던 크리스는 일부러 훔쳤던 귀중품들을 강에 버리고 돌아가던 중, 바지 주머니에 남아 있던 반지를 꺼내 멀리 집어던진다. 난간에 부딪혀 허공으로 튀어 올랐던 반지는 네트 저쪽으로 넘어가지 못한 테니스공처럼, 강바닥으로 깊이 가라앉는 대신 길 위에 굴러떨어진다. 그것을 주운 마약중독자가 뜻밖에도 크리스의 죄를 떠안고 죽은 것이다. 이보다 더 큰 행운이 또 있을까. 그런데 크리스는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까 불안에 떨던 어느 날 밤,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내 범죄가 밝혀진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살아갈 희망이 생기는 걸 거야.”

매치 포인트는 테니스 경기의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1점을 뜻한다. 반지는 크리스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포인트였고 이번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젊고 삶의 게임은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행운이 따라줄까. 프로 테니스 선수로 발탁되는 행운을 누렸다가 아마도 네트에 걸린 공 때문에 중요한 시합에서 거듭 패한 결과 선수 생활을 그만두어야 했을 크리스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믿는 사람일수록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것은 아홉 번의 반복된 행운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단 한 번의 불운이다.

우디 앨런이 감독한 2005년 작품이다.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디 앨런의 영화들은 거의 다 천재적이다. 그의 영화를 만날 때는 음악 또한 기대하게 되는데 바늘이 오래된 레코드판을 긁으며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의 재즈나 오페라 명곡들이 감동을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매치 포인트’에도 베르디, 비제, 로시니 등의 유명 오페라가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드라마 ‘튜더스’에서 여섯 명의 아내를 갈아치우던 헨리 8세 역할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조너선 리스 마이어스가 크리스를, 젊음이 절정의 빛을 뿜어내는 것 같은 스칼렛 요한슨이 노라를 연기한다.

크리스는 이겼다. 그런데 가족들이 유쾌하게 미래를 위한 건배할 때 그는 왜 따로 떨어져 등 돌리고 있는 것일까. 운명에 버림받은 것 같은 그의 얼굴 위로 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크리스는 요약본이나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죄를 지었으나 벌을 받는 과정에서 사랑을 통해 영혼을 구원받은 라스콜니코프. 그런데 크리스에겐 죄만 있을 뿐 벌이 없다. 나쁜 짓을 저지른 걸 보고도 어른이 혼내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운이 좋은 것일까? 무슨 짓을 하든 선물만 주는 어른은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일까. 혹시 버려진 것은 아닐까. 그래도 이겼으면 된 거라고, 억세게 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물론 당신의 자유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