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위엄이 서린 조곡관 전경. 사진 이우석
당당한 위엄이 서린 조곡관 전경. 사진 이우석

길. 길은 원래 두 지점 이상을 잇는 물리적인 통로를 뜻했다. 하지만 인간은 길을 뭔가를 이룰 수 있는 수단, 즉 방도(方途)로 해석하기도 했다. 영어 단어 ‘웨이(way)’에도 같은 뜻이 녹아있다. 동양에서는 더하다. 길을 뜻하는 도(道)는 철학·종교적 개념에서도 중요한 단어다. 득도한다는 것은 이루고자 하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2000년대 들어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시작된 ‘길(걷기) 여행’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특히 걷기 좋은 계절 가을에는 더욱 그렇다. ‘가을 길은 비단길’이란 동요도 있듯, 가을을 걸을 때 시원한 바람이 불고, 파란 하늘을 가린 단풍, 새처럼 나는 낙엽이 있다면 더욱 좋을 법하다. 그런 곳이 경상북도 문경에 있다.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관문이던 조령의 옛길이다.

시월의 한복판은 사실 짧은 가을의 한복판이다. 북녘부터 만산홍엽이 색색으로 물들어가고 커피색 고엽이 들릴락 말락 툭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는 때가 지금이다. 자동차 액셀러레이터 페달에 더 익숙한 발바닥에 낙엽 쌓인 길을 밟아보는 소중한 추억을 새기기 위해 조령을 넘었다. 짧은 가을이 다녀갈 길에 남길 발자국은 다름 아닌 ‘가을의 자취’다. 파란 하늘은 샛노란 햇빛을 얇아진 나뭇잎에 투과해 천연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낙엽이 벌써 카펫처럼 깔려 가을 여행객을 반긴다.

조령(鳥嶺)의 다른 이름은 바로 그 유명한 문경새재다. 워낙 험준해 날개 달린 새도 넘기 어렵다던 고갯길이다. 한양과 동래(현 부산)를 잇던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구간인데 백두대간 고산준령 상당 구간이 이 고갯길에 인접했다. 영남(嶺南) 지명도 조령의 남쪽 땅이란 뜻이다. 조령이 영남과 한양을 이으며 숨통을 틔웠다.

조령이 속한 영남대로는 보부상들과 궁중 진상품이 넘나들던 물산의 교류길이었고 학문이 소통하던 길이었다. 옛길은 크기에 따라 이름으로 구분된다. 수레 3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는 로(路)부터 도(道), 진(畛) 등의 길이 있고. 사람이 걸어서 만들어진 오솔길 경(經)과 두렁길 천(遷) 등이 있다. ‘로’ 자에 대(大)까지 붙은 영남대로는 과거 한반도에서 가장 큰 길이었다. 한양에서 탄천~임오치~충주 안보역~문경새재~유곡역~상주~소야고개~대구~팔조령~밀양~양산~동래로 이어졌다.

영남 지역 유생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할 때, 주로 이 고개를 넘었다. 또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할 때 다시 이 길을 지났다. 퇴계와 서애, 한훤당, 일두 역시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갔을 것이다.

영남에서 한양 가는 길 중 큰 고개(嶺)는 세 곳인데 하필 가장 험준한 조령을 넘었던 까닭은 따로 있다. 남한강 뱃길로 이어지는 최단 거리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문경의 지명 때문이다. 문경(聞慶·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음)의 지명은 특별하다. 문경의 또 다른 이름은 문희(聞喜·기쁜 소식을 들음)다. 수험생인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오가는 길에 ‘기쁜 소식을 듣는 곳’을 지나면, 그 얼마나 든든했을까. 추풍령을 넘으면 왠지 ‘추풍낙엽’ 같고, 영주 풍기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진다는데 그 어떤 미련한 유생이 굳이 얄궂은 이름을 택했을까.

조령은 지금은 선비 대신 가을 여행객이 채우고 있다. 명성에 어울리게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깎아지른 듯 강직한 산세의 조령산과 영암·강진 월출산을 닮은 여성적 곡선을 내는 주흘산이 양쪽에 버티고 섰다. 길을 따라 명경 같은 계곡수가 졸졸 흘러내린다.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등뼈에 해당한다면 영남대로는 핏줄, 대동맥이다. 남쪽에서 출발해 조령을 지나면 북쪽으로는 충청북도 충주와 괴산으로 이어진다.


문경시가 복원한 주막. 사진 이우석
문경시가 복원한 주막. 사진 이우석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

제1관문 주흘관에서 1.2㎞ 정도 오르다 보면 보행자가 묵어가던 원(院) 터가 나온다. 국가지정 호텔 격이다. 실크로드의 캐러밴서리(사막의 숙소)와 비슷한 개념이다. 이곳에서 그릇과 기와 등 다량의 문화재가 출토됐다고 한다. 길은 약간 가파르지만 발바닥에 와닿는 폭신한 느낌이 좋아 힘이 들지 않는다. 걷다 보면 주막도 나온다. 옛 주막 자리를 문경시가 복원했다.

제2 관문(조곡관)으로 오르는 길은 좁아들지만 좀 더 고즈넉하다. 더 고불고불한 길이다. 급작스레 계곡이 좁아지더니 길을 해자(垓子)처럼 막는다. 다리 건너 제2 관문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길은 선비나 보부상에게만 중했던 게 아니었다. 길이 뚫리면 왜적이 한양으로 넘어온다. 그래서 요새처럼 성곽을 지었다. 1.6㎞ 정도 더 오르면 제3 관문(조령관)과 마주한다. 충청도와 도계를 이루는 관문인데 앞에는 관아 터처럼 너른 평지가 있다.

조령관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한강과 낙동강으로 각각 나뉜다고 한다. 걷기 코스는 총 30㎞ 정도지만 보통은 이곳에서 끝내고 다시 내려온다. 원점으로 회귀하는 지점이다. 내려오는 길은 여유롭다. 오를 때는 미처 못 봤던 단풍을 감상하며 내려오면 된다. 쉬엄쉬엄 2시간 왕복 길이다.

한 달쯤 지나면 수능시험이 실시된다. 대대로 수많은 합격생(?)이 다녀가며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었던 문경. 수능이나 입사 등 시험을 앞둔 이라면 머리 한번 식히러 이곳을 다녀가면 좋을 듯하다. 누구나 길의 끝에는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16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둘러볼 만한 곳 제1 관문 안쪽 입구에 ‘옛길박물관’이 있다. 선비들의 의복과 괴나리봇짐 속 물건 등을 전시해놓았다. 단사(도시락), 조롱박(텀블러). 휴대용 작은 책 등이 있다. 얼추 담뱃갑만 한 책은 포켓북이다. 한 손에 들고 걸으며 마무리 공부를 했다. 자칫 ‘커닝페이퍼’로 보일 수도 있을 만큼 깨알같이 작은 글이 빼곡하다.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를 잇는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왕 때 생긴 길이다. 영남대로의 한 구간인 ‘토끼비리’길은 한쪽에 낭떠러지를 두고 걷는 오솔길이다. 비리는 벼랑의 사투리로 토끼나 다닐 좁은 벼랑길이란 뜻이다. 조령 약 8㎞ 남쪽에 있는 진남휴게소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