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장면을 놓고 이야기하는 콘셉트의 글을 연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솔직히 나는 이렇게 많은 작품이 죽음에 대한 내용으로 끝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요즘은 글감으로 적당한 도서를 찾을 때 가장 먼저 마지막 장면에 죽음이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좀 도식적이고 속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끝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것이야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해도 ‘엔딩노트’가 문자 그대로 ‘엔딩노트’가 되어 버리는 상황은 곤란한데…. 이 길로 쭉 가면 나올 거라고 했던 근사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을 때 엄습하는 불안감이 이런 기분일까. 모르는 도시를 찾은 관광객처럼 막막하고 성급해진 마음에는 소설이란 원래가 인생에 대한 비유이므로 인생의 경로를 닮을 수밖에 없다는 말 따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모두의 죽음이지만 다 같은 죽음은 아니라는 말도 귀에 안 들어오기는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경전처럼 받드는 소설이 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찾게 되는 엄마 품 같은 소설 말이다. 내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가 그런 작품이다. 1년에 한 번쯤은 ‘등대로’를 읽는다. 대체로 이렇게 한 해가 시작될 무렵,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는 몸이 기우뚱거리고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부박하게 흔들릴 때, 마음이 좌표를 잃은 듯 캄캄하기만 할 때, 울프 삶에 중요한 반환점이었던 이 작품을 읽으면 장막 하나쯤 벗길 수 있다. 쏟아지는 생각 사이를 떠다니다 보면 중요한 것은 내가 문제 삼고 있는 바깥의 상황이 아니라 문제 삼고 있는 나 자신의 혼돈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는 식이다. ‘등대로’에 한해서라면 나를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뒤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냐면, 그런 말끔한 기분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작품의 끝에서 자꾸만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반복이 문제가 아니라 거듭되는 죽음 앞에서 실은 죽음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죽음과 나의 간극이, 거리가 조금 조정되는 식이다.

피하려고 들어온 곳이 적진 한가운데라더니.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어 든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이 공교롭게도 죽음에 대한 것이다. 소설에도 후렴구라는 게 있는데, ‘등대로’의 후렴구는 이것이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 갔지.” 등장하는 인물은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이 문장을 읊조린다. 사실 ‘등대로’야말로 죽음에 대한 책이고 죽음에 대한 책이라면 제일 먼저 ‘등대로’를 떠올려야 한다. 그러나 소멸이란 말이 빚어내는 정신의 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이 소설의 끝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무지와 두려움의 영역에 대한 끝없는 사색의 결과는 오히려 확신이다. 극 중 화가인 릴리 브리스코는 캔버스 가운데에 선을 긋는다. 20세기 가장 확신에 찬 선이 캔버스 위에 탄생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 확신에 찬 선을 만나기 위해 ‘등대로’를 읽고 또 읽는 것만 같다.


내일의 사실이 오늘 희망을 차단할 수 없다

이때의 확신은 자만과 다르다. ‘등대로’는 등대로 가고 싶어 하는 아이의 기대 반 걱정 반 섞인 마음에서 시작해 10여 년이 흘러 등대로 가는 데에서 끝난다. 등대로 갈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아이의 마음에 답하는 부모는 대조적인 반응을 보인다. 아버지는 날씨가 안 좋아 갈 수 없을 거라고 단정한다. 팩트를 신봉하는 그는 사사건건 확신하며 미래로 연장되는 마음을, 그러니까 기대나 기적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안 될 거라는 아버지의 말이 어린 마음에 새겼을 상처의 무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반대편에 램지 부인이 있다.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 등대에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아들에게 램지 부인의 말은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 비가 오면 등대에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사실이 오늘의 희망을 차단할 수는 없다.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고 소설에 등장하는 램지 부인의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램지 부인의 확신.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확신.

‘등대로’는 버지니아 울프가 마흔다섯 살에 완성한 소설이다. 이 작품을 쓰기 전까지 버지니아 울프는 항상 부모님에 대해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부모란 그리움을 동반하는 서정적 감정이 아니라 통증이 수반되는 공포의 감정의 대상이었다. ‘등대로’를 쓰고 나서는 더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확신을 찾았기 때문이리라. 마음속에 떠오르는 경계 없는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최선의 리얼리티라고 여겼던 모더니즘의 기수는 “희미하고 실체가 없지만 놀랍게도 순수하고 자극적인” 것들을 향해 말한다. “이제 그것을 보았어.” ‘등대로’의 엔딩은 세상의 모호한 것들을 향해 보내는 버지니아 울프의 확신이다. 길 잃은 관광객의 마음에 다시 확신이 차오른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년 런던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수준의 지적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의 주도로 시작된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버지니아는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어울려 예술혼을 키웠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으며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며 영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1년 정신 질환의 재발을 우려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