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국인 사이에서 ‘체르노빌’이 화제라고 들었다. 인류 최악의 인재로 기록된 구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태를 재구성한 드라마인 ‘체르노빌’은 2019년 미국에서 방영돼 호평받았고 국내에서는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왓챠’에서 서비스하고 있다.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최대한 넓은 범위로 조명하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이 작품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내용은 폭발의 성격을 규정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다. 관리들은 ‘본능적으로’ 사건을 축소하고 진상을 은폐하려 든다. 정부가 폭발의 실체를 외면하고 방사능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동안 시민들이 죽음에 노출되는 시간은 늘어나고 사고는 걷잡을 수 없는 재난으로 악화된다. 며칠 전 코로나19 확산을 경고했던 의사 리원량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는 중국 우한에 새로운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린 여덟 명의 의사 중 한 명으로, 괴담 유포자로 몰려 경찰의 처벌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축소, 은폐, 커지는 죽음의 그림자. 중국인이 왜 ‘체르노빌’을 보며 자국 정부를 비판하는지 짐작하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한 지역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위협이 한국까지 확산되고 있는 요즈음, 한국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다시 주목받는 소설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알제리 항구 도시 오랑에 쥐가 페스트를 몰고 온다. 정부는 오랑을 페스트 재해지구로 선포하고 도시를 전면 봉쇄한다.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채 죽음과 투쟁하는 인간들. 소설은 페스트령이 내려진 오랑에서 수개월 동안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중국과 한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두 작품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1947년에 출간된 ‘페스트’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뤄지는 갈등 상황이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사건을 재구성한 드라마에서도 핵심적인 갈등으로 드러나더니 2020년 진행 중인 코로나19 국면에서도 복사한 것처럼 똑같이 재현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황을 인지했을 때 책임자들은 사건의 실체를 일단 부정한다.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마지못해 시인하는데, 그 사실을 대중에게 공표하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한다. 그러나 어느 조직에서나 있기 마련인 ‘반항아’들로 인해 사건의 실체가 알려지고 끝날 것 같지 않던 지옥의 시간은 선량한 시민들의 헌신과 도움으로 회복세에 접어든다. 재난 서사의 흔한 플롯이다.

‘페스트’도 언뜻 그런 구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페스트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페스트라는 공공의 적은 소멸했고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던 도시는 다시 환희에 차올라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노래하고 있으니 이를 두고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하나도 없겠다. 그러나 작가는 진범을 잡지 못한 공포 영화나 다음 시즌을 예고하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모종의 찝찝함을 남겨둔 채 막을 내린다.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말해 두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기록하기로 결정한 리외가 끝내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고 도시를 지켜낸 ‘위대한 시간’을 승리의 서사로 갈음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사라진 페스트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아직 모르고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페스트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행동양식뿐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페스트에 대항한다. 파늘루 신부처럼 초월적 신념으로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체념하는 경우, 보건위원회 사람처럼 행정적 관념으로 판단을 유예함으로써 사실상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 리외처럼 종교적 신념도 행정적 관념도 부정하고 구체적 실천만을 따름으로써 반항하는 경우. 요컨대 체념과 도피 그리고 반항.


끝났지만 끝이 아닌 불변의 진리

“솔직하게 당신 생각을 말해 주시오.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하십니까?” 사태가 페스트임을 확증할 수 있냐는 보건 당국의 질문에 대한 리외의 대답은 정확히 반항자의 그것이다.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의 문제가 아니고 시간 문제입니다.”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이야기는 어떤 안정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역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의 고독과 고통만을 판단 근거로 삼았던 인간들의 반항적 선택을 기억하는 한 이 이야기는 끝내 패배의 역사도 아닌 것이다. 페스트는 죽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망각 속을 헤맬 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잠든 쥐를 깨워 도시로 보낼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에 맞선 인간들의 우정과 사랑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한 이 비극의 종언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끝났지만 아주 끝난 건 아닌,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엔딩은 영원한 고통도 영원한 행복도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닮았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알제리는 모로코 옆에 있는 나라, 혹은 지중해를 품고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파리의 지식인 카뮈에게는 그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생의 조건이기도 했다.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열렬한 찬사와 차가운 외면을 동시에 받았던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핵심 테마는 부조리, 반항 그리고 사랑이다. 널리 알려진 ‘이방인’을 비롯해 에세이 ‘시시포스의 신화’가 세계의 부조리를 탐색한 작품이라면 ‘페스트’는 반항이라는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에게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은 반항으로, 카뮈는 이 작품 이후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실존주의 문학의 상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다루는 작품인 ‘최초의 인간’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작품을 집필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가족과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 이민자들의 삶을 다뤘던 ‘최초의 인간’을 통해 카뮈는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뮈의 독자들에겐 미완의 ‘사랑’만을 남겨둔 채 떠나 버린 그의 죽음이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