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부부의 세계’를 본다. 6회 방송분 기준, 시청률 18.8%를 기록한 이 드라마가 비지상파 시청률 신기록을 세운 ‘SKY 캐슬’의 최고 시청률인 23.8%를 넘기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아내가 느끼는 배신감과 복수가 전반전이었다면 쫓기듯 떠난 남편이 새로 꾸린 가정을 등에 업고 돌아와 또 한 번의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 앞으로 방영될 후반전의 시작이다. 싸움도 1회전보단 2회전이 더 격정적인 법이다. ‘부부의 세계’가 ‘SKY 캐슬’의 시청률을 뛰어넘는 건 물론이고 마의 30%를 돌파하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전망이 과장만은 아니다. 불륜과 치정으로 얼룩진 막장극이라 할 이 드라마가 여느 막장극과 다른 것이 있다면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인공 내면의 역사가 그리 간단치 않고, 배반에 의한 복수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사용하는 각종 수단과 방법이 그를 다만 피해자라는 전형성에 묶어 두지 않고 괴물을 단죄하기 위해 괴물이 돼 가는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일 것이다. 복수의 칼날이 베는 게 어디 타인의 인생뿐일까. 칼을 휘두르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몸에도 상처가 나기 마련이다.

‘나도’ 본다고 했지만 사실 불륜과 치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결혼은 약속과 구속이 공존하는 모순된 관계다. 약속할 때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그 선택에는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돼 있다. 결혼을 결심할 때 우리는 형식적으로 안정적이고 내용적으로 불안정한 이 모순을 기꺼이, 나아가 기껍게 받아들이지만, 인간의 욕망은 종종, 실은 자주 초심을 잃는다. 변해 가는 관계에서 약속과 구속이라는 긴장 상태, 혹은 타협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점화하는 비극에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파괴적인 감정을 종합적으로 만날 수 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세계에 대해 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거나 그 세계로부터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충격 앞에서 인간은 미움과 증오를 넘어 끝도 없는 회의에 빠진다. 6회에서 주인공은 남편의 불륜 사실을 소위 상간녀의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폭로해 버린다. 진창으로 모두를 데리고 들어가 함께 굴러가며 남편과 이별을 완수한 주인공은 이후 카페테라스에 아들과 마주 앉아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부부란 뭐였을까, 결혼이란 무엇이며 지난 시간은 다 뭐였을까. 대답 없는 질문을 거듭하며 회의에 빠지던 그는 이내 질문을 멈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묻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를 찾지 않겠다는 말이다. 지난 시간이 다 무슨 의미였는지, 부부란 도대체 어떤 관계이며 그 결속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 안에 우리를 안심시켜 줄 의미 따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존재한다고 한들 작은 충격에도 손상될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상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할 테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엇에도 대답하지 않는 소설이라면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질투’는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한 남자가 끈질기게, 아니 거의 강박과 집착에 가까울 만큼 집요하게 아내를 관찰하는 시선을 그리는 작품이다. 흔히 소설과 함께 떠올리는 갈등 상황이나 매력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한 몰입감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어떤 것도 만족시켜 주지 않는 작품일 것이다. 소설에는 ‘나’와 아내, 그리고 아내와 모종의 ‘내연’ 관계일 거라고 의심받는 이웃 남자 프랑크가 등장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를, 때로는 아내와 함께 있는 프랑크를 묘사하는 시선만 존재할 뿐 그들을 바라보는 주인공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러니까 그의 마음 상태에는 끝내 가 닿을 수 없다. 지리하고 멸렬하게 이어지는, 그러나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팽배한 이 무심한 관찰은 따분하기보다는 기이하고 공포스럽다. 


한 조각의 내면도 드러내지 않는 기이함

이 기괴한 소설은 귀뚜라미 소리만 실감할 수 있는 캄캄한 밤 풍경으로 끝난다. 풍경이 인물 내면의 거울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도 않다. 더운 날 한밤의 풍경을 묘사하는 이 문장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지금은 밤이고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인 침묵의 엔딩. 따라서 이 사실의 기술에서 화자가 느끼는 질투의 감정을 읽어내려는 시도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풍경에는 의미가 없다. 바라보는 시선만 있을 뿐이다. 요컨대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조각의 내면도 드러내지 않고 지독하게 외부의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무력함, 그러니까 상대의 변심을 알 수 없고 나아가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타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하게 실체가 있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약속과 구속 사이에서 방황할 때 나도 종종 이 공허하고 쓸쓸한 풍경을 떠올린다. 해결되는 건 없지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이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소설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1922년 프랑스 브레스트에서 태어났다. 1942년 국립농업기술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국립통계연구소에서 근무했다. 1950년 식민지 과실 및 감귤류 연구소의 농림 기사로 일하다가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고무지우개’ ‘엿보는 사람’ 등의 작품으로 1955년 비평가상을 받았다. 1957년 ‘질투’를 발표했고, 1959년 ‘미궁 속에서’를 출간해 언론의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1961년 ‘영화 소설’이라는 장르를 표방하며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발표했다. 알랭 레네가 연출한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는 모더니즘 영화, 그중에서도 전후 프랑스 영화의 시금석으로 평가받는다. 1963년 직접 감독 및 제작한 첫 영화 ‘불멸의 여인’이 루이 델뤼크상을 받았고 1995년 공동 제작한 영화 ‘미치게 하는 소리’가 베를린 영화제 공식 선정작에 올랐다. 영화감독과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2001년에는 80세의 나이로 소설 ‘반복’을 발표했다. ‘질투’를 비롯한 대표작에서 일체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듯 엄격하게 객관화한 시선을 작품 속에 도입하는 새로운 기법을 선보인 그는 누보로망의 대표 작가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