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흥집의 소머리국밥. 사진 김하늘
홍흥집의 소머리국밥. 사진 김하늘

홍흥집
메뉴 소머리국밥, 반반 수육
주소 충남 홍성군 홍성읍 홍성천길 234
영업 시간 수요일 휴무, 장날이 수요일인 주는 목요일 휴무
11:30~17:00 재료 소진 시 조기 마감, 장날은 10:00~17:00


씨름판에서 모래를 털고 나와 바다로 뛰어든 한 사내의 이야기다. 어떤 격랑에도 물러서지 않는 한 선장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홍명완. 올해로 38세. 충청남도 보령 천수만 오천항에서 일곱 척의 멸치 배를 이끄는 청년 어부. 출항을 앞두고 하늘과 땅이 물로 가득 찬 망망대해를 향해 그가 서 있다. 적잖이 긴장한 모습으로.

연분홍 벚꽃 잔흔이 동그랗게 흩날리는 어느 4월 충남 홍성 재래시장, 저 멀리 씨름판과 바다의 기백이 넘치는 한 사내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다. 우람한 덩치에 다부진 눈매, 살지고 영근 두 볼, 청청한 젊은 기운을 괄괄하게 뿜어내는 바닷사람, 홍 선장. 해풍을 등에 지고 오는 듯한 그의 풍채는 뭘 엎어 치고 낚아채고도 남을 법하다. 홍 선장은 국밥 한 그릇이 간절하다며 내 발걸음을 덜컥 재촉한다. 덧붙여진 그의 한 마디에 구미가 훅 당긴다.

“제가 잡는 멸치만큼 맛있는 고깃국이에요. 늦게 가면 없어요.”

넓을 ‘홍’에 흥할 ‘흥’자를 써서 ‘홍흥집’. 3대째 내려온 70년 된 소머리국밥집으로, 홍성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소문난 집이다. 주인은 매일 새벽, 갓 잡은 한우 암소 머리와 돼지 막창을 사러 광천 도축장에 간다. 물건은 하루 장사할 만큼의 양만 산다. 소머리는 핏물을 빼고 막창은 뒤집어 밀가루와 굵은 소금으로 속을 긁어내고 각각 솥에 맹물을 넣고 5시간, 2시간씩 푹푹 끓인다. 더해지는 건 간수 뺀 굵은 소금, 다른 조미료는 필요 없다.

장날에는 평소보다 1시간 반 일찍 문을 여는데, 그야말로 문전성시. 점심시간이 지나면 머리고 내장이고 홀딱 다 팔리고 없을때가 태반이다.

소머리국밥 두 그릇과 반반 수육 하나, 공깃밥과 김치 등으로 한 상이 차려졌다. 머리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 흠칫 놀란다.

서둘러 수육 접시 위 고기와 내장을 허겁지겁 낚아채 먹는다. 서울에는 없는 맛이다. 마침 소주 한 병이 출석한다. 부들부들한 우설과 혀를 섞고 한 잔, 탱글탱글한 막창과 치아를 부딪치며 한 잔. 소주에 개근상과 공로상을 수여한다.

“저는 위로받고 싶을 때 이 집에 와요. 조업 끝나고 국밥 한 그릇에 반주하면서 ‘오늘도 살았구나’ 하며 한시름 놓죠.”


씨름을 하다가 멸치잡이 배를 타는 홍명완 선장. 사진 홍명완
씨름을 하다가 멸치잡이 배를 타는 홍명완 선장. 사진 홍명완

뚝배기와 술병을 다 비울 무렵, 동그란 두 볼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뜨뜻한 국밥과 타오르는 소주 한 잔에 안온한 미소를 띤다. 그는 광천시장에서 30년 넘게 생선 장사를 하셨던 할머니, 건어물 중개인으로 사업을 일궈 대규모의 김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물건 보는 안목이 탁월하고 사업 수완이 좋은 부친 덕에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기골과 살집을 타고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씨름 선수 생활을 했다.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모래판에 발바닥을 비비면 힘이 솟았다. 쉬지 않고 줄기차게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식간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가세가 크게 기울고 부모님의 이혼까지 겹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다. 지지고 볶고 부대끼며 느꼈던 온기 대신 집념의 승부욕으로 마음속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렇게 씨름에 매달린 지 10년 차,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여전히 그는 선수로서 주목받지 못했다. 생계의 위협이 턱밑까지 차오르던 때, 씨름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망한 꿈을 좇는 것이었다.

샅바를 버리고 그물을 쥐었다. 멸치잡이 뱃일을 배웠다. 만리창파 한가운데 어망을 찾아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닷물과 눈물, 콧물 뒤집어쓰며 멸치를 잡아 배로 올리고, 소금물이 부글부글 끓는 솥에 멸치를 삶고, 신속히 뭍으로 보내 가공하는 일. 오죽하면 ‘갑판 세 발치 넘어서면 황천길’이라는 말이 있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위험천만하고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바다는 그저 돌파하고 정복해야 하는 것,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멸치로 떼돈을 벌어 흩어진 가족과 다시 모여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들끓었던 열망은 늘 두려움을 앞섰다. 바다를 벗어나 우두커니 홀로 있을 때면, 잡히지 않는 공허함에 차디찬 서리가 내리곤 했다. 그럴 때 그는 국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술을 벗 삼았다.


홍흥집의 반반 수육. 사진 김하늘
홍흥집의 반반 수육. 사진 김하늘
홍명완 선장의 멸치잡이 배 동진호. 사진 김하늘
홍명완 선장의 멸치잡이 배 동진호. 사진 김하늘

국밥 한 그릇은 뭍을 밟았음을 확인하는 인장

일진일퇴해도 나아가면 된다고 믿었던 현실은 참담하고 냉혹했다. 2008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어느 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선원들과 함께 조업에 나섰다. 순조롭게 작업을 하던 중, 선원 한 명이 갑판에서 미끄러져 솥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뜨거운 소금물에 빠진 선원은 놀라 그대로 솥 안에 주저앉았고, 홍 선장은 맨손으로 그를 건져 바닷물로 내던졌다.

곧바로 선원을 건져 올려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얼마 안 돼 숨을 거뒀다. 그리고 첫 선원을 잃은 지 2년 되던 해, 가족이자 동료였던 선원 한 명을 실족사로 잃었다.

홍 선장에게 남은 건 자책감뿐이었다. 기억의 파편은 틈입해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조업은 거듭 실패했고 부채는 쌓여갔다. 절망의 돌림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바다를 등지지 않았다. 술에 빠져 살던 날도 있었지만, 밤낮으로 뱃일과 막노동을 겸하며 빚을 갚아 나갔다. 어느덧, 흩어졌던 식구들과는 다시 가족이 되었다. 올해는 그가 운영하는 수산물 회사도 첫 흑자 전환을 했다.

그는 요즘 다가오는 6월 출항을 맞이하여, 준비에 한창이다. 뜨끈한 국밥은커녕 차가운 빗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일이 허다할 거라는 것도, 목숨을 걸고 파도와 싸워야 하는 것도 그는 익히 알고 있다. 두 아들과 아내가 있어, 바다로 뛰어드는 게 이제 두렵기도 하다.

그는 오늘도 국밥 한 그릇을 비운다. 고난의 시절 국밥은 시린 마음을 안아주는 담요였다. 지금의 그에게 국밥은 무사히 뭍을 밟았음을 확인하는 인장이다.

바다가 그에게 만선의 기쁨을 선물한다면, 육지는 그에게 일상을 살아갈 기운을 주유한다. “어부는 바다가 주는 대로 받아요. 더 원한다고 더 얻지 못하죠.”

앞으로도 그의 삶은 바다와 곡진하게 동행할 것이다. 자연에 온전히 순응하고 세상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으면서.


▒ 김하늘
외식 컨설팅 회사 ‘라이스앤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