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시시때때로 조조 앞에 나타나 함께 놀고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눈다. 조조의 상상 속 친구이다 보니 히틀러의 수준도 아이의 한계를 벗어나진 않는다. 사진은 주인공 조조(오른쪽·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상상 속 히틀러와 대화하는 장면. 사진 IMDB
히틀러는 시시때때로 조조 앞에 나타나 함께 놀고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눈다. 조조의 상상 속 친구이다 보니 히틀러의 수준도 아이의 한계를 벗어나진 않는다. 사진은 주인공 조조(오른쪽·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상상 속 히틀러와 대화하는 장면. 사진 IMDB

어린이는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까? “당연하지, 애들이 뭔 걱정이야?” 하고 답한다면, 유년 시절을 잃어버린 기성세대, 어렸을 때 흉보던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들도 작은 어깨에 저마다 짐을 지고 살아간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질서 안에서, 그들만의 규칙이 지배하는 또래 집단 속에서 치열하게 경험하고 배우고 경쟁하며 혼란과 고통을 겪는다. 하물며 친구들하고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부모를 잃었다면,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부재한 가정이라면 또는 기아로 허덕이거나 전쟁 중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제 막 열 살이 된 조조는 그토록 바라던 독일소년단에 입단한다. 조조에겐 히틀러가 세상에서 가장 용맹하고 멋진 지도자다. 제일 친한 친구 요키보다 히틀러가 더 좋다고 말할 정도로 조조는 나치라는 환상에 푹 빠져 있다. 히틀러는 시시때때로 조조 앞에 나타나 함께 놀고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눈다. 조조의 상상 속 친구이다 보니 히틀러의 수준도 아이의 한계를 벗어나진 않는다.

나치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불사르질 않나, 귀여운 토끼를 죽이라고 하질 않나, 막상 시작된 캠프 훈련은 쉽지 않다. 선배와 친구들은 그를 토끼도 죽이지 못하는 겁쟁이, 조조 래빗이라고 부르며 놀린다. 속상해하는 조조 앞에 나타난 히틀러는 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용감한 토끼가 돼보라며 격려해준다. 조조는 용기를 내서 훈련장으로 돌아가지만, 힘껏 집어던진 폭탄이 그만 나무에 튕겨 맞고 날아와 눈앞에서 터지고 만다.

과도한 이념과 사상, 정치와 전쟁에 노출된 아이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는다는 걸 증명하듯, 조조의 얼굴 반쪽은 심한 흉터로 얼룩져버린다. 거울을 보고 상심한 조조는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남편과 딸에 이어 아들마저 잃을 뻔했던 엄마 로지는 그래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품에서 놓지 않고 안전한 곳에 꼭꼭 감춰놓고 싶을 텐데 “너는 최고의 사령관”이라고 격려하며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준다.

‘어머니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는 감독의 말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조조와 로지가 함께한 모든 장면과 대사들이 가슴에 남는다. 조조의 신발 끈을 매주는 장면, 함께 자전거를 타는 장면, 함께 춤을 추고 잠자리에서 윙크하는 장면 하나하나, 많은 분량도 아닌데 아들과 엄마의 마음을 사랑스럽게 담아냈다.

로지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허전함을 이해한다. 아이답게 자라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면서도 세상이 강요하는 대로 히틀러를 좋아하고 나치에 열광하는 마음도 헤아린다. 아무리 비뚤어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조조가 결국은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인생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한편 조조는 로지가 집에 몰래 숨겨주고 있던 엘사와 마주치게 된다. 상상 속 히틀러는 당장 게슈타포를 찾아가 고발해야 한다고 다그치지만, 유대인을 숨겨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엄마도 죽고 자신도 공범으로 처벌받게 되리라는 걸 알고 조조는 혼란에 빠진다. 엘사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유대인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아간다. 엘사가 자꾸만 좋아지는 가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조조는 엄마가 온종일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게 되고 끝내 교수형 당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정신을 수습할 틈도 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게슈타포.

엘사는 발각되는 것일까? 조조도 반역자가 되어 끌려가는 것일까?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 해도 앞으로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조조는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리라 믿었던 나치와 히틀러가 괴물처럼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줄거리만 보면 어둡고 심란할 것 같지만 그 시절을 배경으로 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영화는 시종 발랄하고 재미있고 달콤하다. 그러나 천진한 아이의 눈에 비친 히틀러 시대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결과, 잘못된 이념과 전쟁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는지 더욱 분명하게 전달한다.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히틀러 시대

조조는 풀어진 누군가의 신발 끈을 보면 말없이 다가가 묶어주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웃으며 춤출 수 있는, 썩 괜찮은 어른으로 자랄 것 같다. 전쟁을 핑계 대지 않고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로지와 위험 속에서도 용기 있게 살아남은 엘사 그리고 나치 장교이면서도 결정적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던 클렌젠도프 대위 같은 인생 선배들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배려와 믿음은 사랑받아본 적 있는 마음에서만 자란다.

배우로, 각색가로, 감독으로 활동해온 타이카 와이티티의 작품이다. 조조의 상상 속 히틀러로도 출연한 그는 이 영화로 2020년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는 등 많은 찬사를 받았다. 10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한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깜찍하게 표현한 조조는 이 영화를 눈부시게 하는 가장 큰 보석이다. 육감적 외면으로 더 강렬히 인식되었던 스칼렛 요한슨이 이 영화에서 보여준 속 깊은 로지의 미소도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어린애가 무슨 걱정이 있어?”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일수록 되새기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년의 기억을 세월의 저편으로 던져버리고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한 번도 실망한 적 없고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우기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는 인정받고 싶어 했고 사랑받고 싶어 했던 아이가 웅크리고 있는데 말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자라지 않는 아이가 산다. 그 작은 아이를 가슴에 꼭 안아 토닥여줄 수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다. 그런 어른만이 눈앞의 아이들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꼭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어떤 면에서 세상은 전쟁터다. 부모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해서 아이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내 아이를 상처 없이 키울 수 있을까, 이것이 모든 부모의 근본적인 두려움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씩씩하고 지혜로운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 하얀 눈 속에 먹이를 찾으러 나온 작은 토끼처럼. 힘들고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잘 자라 어른이 된 당신처럼. 사람이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내 걱정시키고 가끔은 대견하고 이따금 미소 짓게 하는 아이들이 없다면 어른들의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