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용사였던 월트(왼쪽·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생의 마지막 전쟁을 위해 홀로 일어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갱들과 맞선다. 사진 IMDB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월트(왼쪽·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생의 마지막 전쟁을 위해 홀로 일어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갱들과 맞선다. 사진 IMDB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월트는 평생 일했던 회사에서 은퇴한 뒤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아내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들과 며느리에게서는 슬픔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겐 혼자 남겨진 늙은 아버지가 행여 짐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양로원에 보내고 집을 팔면 돈이 좀 될 텐데 하는 기대뿐이다. 손자들은 장난하느라 정신이 없고 배꼽에 피어싱하고 나타난 손녀는 할아버지가 죽으면 이것저것 가져가고 싶다며 대놓고 욕심을 내서 월트의 말문을 막는다.

삶이 어쩌고 죽음이 어쩌고, 장례식에서 설교를 늘어놓던 새파랗게 젊은 신부는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고해성사를 하라고 빚쟁이처럼 졸라댄다. 월트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아내가 죽기 전에 부탁했다는 것이다. 본분을 다하려는 것인 줄 알면서도 신부가 성가시기만 한 월트는 따지듯 묻는다. “삶과 죽음에 대해 신부님이 뭘 압니까?”

월트의 삶을 지배하는 건 오래전 한국전에서 경험했던 죽음이다.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건 크나큰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손주들은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 줄도 모른다. 비명이 난무하던 전쟁터의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린 소년병들까지 죽이고 살아와서 받은 훈장 하나가 전쟁의 상흔을 치료할 수 있었을 리도 없다. 

그에게 남겨진 거라곤 낡은 집과 아내와의 추억을 간직한 늙은 개 한 마리 그리고 애지중지 관리할 뿐 차고에 세워 둔 1972년에 산 자동차, 그랜 토리노뿐이다. 그나마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다녀온 월트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해 질 무렵, 맥주 한 캔을 들고 현관 앞에 나가 앉아 있노라면 수십 년을 살아온 마을도 더 이상 익숙한 풍경이 아니다. 백인들은 거의 다 빠져나가고 유색인들로 채워진 거리는 낯설기만 하다. 옆집 동양인들은 축하할 일이 뭐 그리 많은지 자주 모여서 법석을 떨고 싹수가 노란 양아치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주민들을 위협한다.

존중받아야 할 전통과 인간의 품격이 모두 무너진 것 같은 시대, 월트의 마음에 드는 거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는 갱들에게 위협을 당하던 옆집 남매, 수와 타오를 구해준 것을 계기로 이방인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갱들에게 협박당한 타오가 마지못해 그랜 토리노를 훔치러 왔을 때 혼쭐을 내주긴 했지만 숫기 없는 청년이 실은 속이 반듯하고 성실하다는 것을 월트는 이내 알아본다. 동생과 달리 야무지고 활달한 수는 그의 무뚝뚝함을 겁내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가와서는 단단히 잠겨 있던 마음의 빗장을 슬그머니 풀어놓는다.

그들과 가까워질수록 월트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갱들이 불안하기만 하다. 수와 타오를 괴롭히는 걸 보다 못한 그는 갱 두목을 찾아가 한 번만 더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노인의 말을 순순히 들을 리 없다. 타오의 집에 난사를 퍼붓는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은 갱들은 보란 듯이 수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한다.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그것이 불씨가 되어 조만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예상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만신창이가 된 수를 보며 모든 게 자기 책임인 것만 같은 월트는 깨닫는다. 마을에 갱들이 존재하는 한 타오와 수가 자유롭게 살아갈 미래는 없으리라는 것을.

“한국전에서 공산군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소. 맞서 싸웠지.” 갱들의 위협을 알게 된 신부가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위험을 자초하느냐고 물었을 때 월트는 대답한다. 문제가 생기면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 것, 자신의 일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월트가 오랜 세월 경험으로 배운 지혜와 교훈이다. 그러나 누나의 복수를 하겠다며 타오가 달려왔을 때 그는 닦고 있던 총을 내려놓으며 단호히 가로막는다. 월트는 인생의 마지막 전쟁을 위해 홀로 일어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갱들에게서 수와 타오를 지켜내기 위해.


백전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명작

할리우드의 백전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제작, 주연을 맡아 2008년에 개봉한 영화다. 총소리가 요란하지도 않고 유명 배우들이 화면을 채우며 스펙터클한 재미를 주지도 않는다. 삶과 죽음, 자유와 방종, 인종과 세대 간에 놓인 거리를 조용히 넘나들며 나직하게 사랑을 이야기할 뿐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고집불통 영감이 왜 저래? 하다가 시대가 변해도 소중히 지켜내야 할 가치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들고 어느 순간, 가슴이 뜨끈해지면서 마음의 벽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힘과 여운을 가진 명작이다. 

인생은 평등하지 않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어떤 이는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짐을 지고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어떤 이에게 보호받으며 사는 행운을 타고난다. 젊은 시절, 바다 건너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국인의 자유를 지켜주었던 월트는 또다시 이웃의 젊은이들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기로에 선다. 아니, 운명 같은 건 없다. 월트 스스로 선택하고 기꺼이 끌어안은 삶일 뿐. 

전쟁이란 지독한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남의 생명을 빼앗아 누군가를 지키는 일은 아무리 훌륭한 명분으로 치러졌다 해도 죽은 자들의 무게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월트는 삶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타오를 막아선 것도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가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하지만 자유를 지키려면 자유를 위협하는 적들과 전쟁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월트는 잘 알고 있었다.

전쟁과 죽음의 카르마(karma·업)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서 한 세대로 확장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중국인으로 오해하기 쉬운 타오와 수가 아시아 산악지대에 흩어져 살던 몽족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특별하다. 월트가 참전하지 않았지만, 베트남전에서 미군 편에 섰다가 철수 후 공산당에 무자비한 학살을 당한 소수민족, 타오와 수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온 그들의 후예다. 감독은 과거의 미국이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고 한다. 수많은 희생, 그 위에서 태어나 자라며 때로는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와 현재, 수많은 월트와 그의 동료들이 지켜낸 자유, 그들에게 얻어 쓴 만큼 다음 세대를 위해 갚아야만 하는 빚, 그것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오늘의 자유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