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자택 서재에서의 민병일 시인. 사진 조선일보 DB
광주 자택 서재에서의 민병일 시인. 사진 조선일보 DB

바오밥나무와 방랑자
민병일│문학과 지성사│230쪽│1만6000원

“나는 ‘바오밥나무와 방랑자’를 쓰며 유희적 사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칸트 미학의 핵심인 ‘자유로운 유희(Freies Spiel)’를 떠올렸습니다. 자연 속의 나무와 꽃과 돌과 곤충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러한 자연미처럼 일체의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 유희의 즐거움을, 동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민병일 시인이 동화책 ‘바오밥나무와 방랑자’를 최근 출간했다. 민 시인은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시각예술학을 공부한 사진작가이자 북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의 동화는 서양 미학에 기초한 사유의 향연에 성인 독자를 초대한다. 어른이 아니더라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청소년 독자라면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

철학자 칸트가 말한 ‘자유로운 유희’의 본질이 순수한 동심의 재현에 있듯이, 민 시인의 동화는 예술이라는 유희를 통해 고양된 영혼의 결정체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 동화는 독일 철학과 미학의 개념어를 빈번하게 등장시키기 때문에, 자칫 유럽식 관념 유희의 서사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시인의 서술 방식이 동아시아 사상의 고전 ‘장자(莊子)’에 동원된 우화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구수한 옛날이야기처럼 편안하게 읽힌다.

민 시인은 영혼 순례를 위해 길을 떠난 여러 방랑자가 한 그루 바오밥나무를 만나 나누는 대화를 바탕으로 동화 형식의 철학 우화를 풀어놓는다. 그 방랑자들은 폐기된 꿈의 수집가, 삶의 찰나를 줍는 순간의 수집가, 그림자를 찍는 사진사, 줄 타는 광대 등등 시인의 다양한 분신들이다.

바오밥나무가 ‘순간 수집가’를 만나 “순간을 어떻게 수집하면 될까요?”라고 묻자 “순간을 즐겨보세요. 순간에는 영원의 소리 없는 부름이 숨어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동화책을 수놓은 여러 이야기는 저마다 순간의 영원성을 내면화하는 여행을 권유하면서 한 편의 탐구 서사로 묶인다.

“여행자의 영혼에는 설렘이란 울림판이 있습니다. 여행자들은 설렘의 울림판을 따라 지도 위를 산책하다가 밤이 오면 점성술사처럼 별을 세지요. 때로는 열쇠 수선공처럼 고장 난 마음을 수선하여 잠긴 마음의 자물통을 열기도 합니다. 여행만큼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게 또 있을까요? 관념으로부터, 삶의 억압으로부터, 내면의 황폐함으로부터, 일상의 상처로부터, 이루지 못한 꿈으로부터, 초현실에 대한 의지로부터, 여행이라는 설렘의 울림판은 일상을 해방시켜줍니다.”

그 여행은 경험 현실의 공간 이동에 국한되기보다는 “흘러가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 꼬투리를 잡지 말고, 당신만의 특별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에 집중하세요”라고 주문하는 시간 사용법이기도 하다. 카이로스의 순간은 예술 체험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인식된다.

민 시인은 카이로스가 머무는 예술세계를 ‘형상 공간’이라고 부른다. “형상 공간이란 사람의 심연에 있는 마술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 조선 시대 백자 달 항아리,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헤세의 ‘데미안’, 루브르 박물관과 쾰른 대성당 등도 마음속 형상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민 시인은 머리말을 통해 “바오밥나무는 그 누구의 바오밥나무도 아닌, 내면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며 “그 나무는 자아를 비추는 거울 속의 거울”이라고 밝혔다. 동화책에 들어가는 삽화를 직접 그린 민 시인은 “화가도 아니면서 철없이 책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그림은 글쓰기의 또 다른 유희이며 동화에 숨겨진 또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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