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뮤지션 엔도 켄지의 앨범 ‘카레라이스’는 일본 대중이 사랑한 첫 포크송이었다. 엔도 켄지는 훗날 ‘불멸의 남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했다. 사진 엔도 켄지 공식 홈페이지
일본 뮤지션 엔도 켄지의 앨범 ‘카레라이스’는 일본 대중이 사랑한 첫 포크송이었다. 엔도 켄지는 훗날 ‘불멸의 남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했다. 사진 엔도 켄지 공식 홈페이지

낙관이 절망으로 바뀐 주말이었다. 연휴가 끝나기도 전에 몇 달 전의 비관을 다시 겪어야 했다. 아니,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태에 분노가 치솟았다.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던, 정치 이념과 그릇된 믿음의 결사체로 인해 억장은 무너지고 울화가 터진다. 조금씩 재개되던 공연과 행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무력감에 화병이 걸릴 것 같다. 이래선 곤란하다. 마음을 다잡는다. 한 곡의 노래를 떠올린다.

1970년 11월 25일, 일본에서 한 남자가 자살했다. 허무맹랑한 드라마 같았다. 일본 육상 자위대 간토 지역 총감(사령관)을 방문, 돌연 총감을 인질로 잡은 후 자위대 간부들과 칼부림을 했다. 상황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모였다. 그는 발코니로 나가 평화 헌법 개정과 자위대의 쿠데타를 주장했다. 반응은 싸늘했다. 야유가 빗발쳤다. 그는 발코니를 향해 앉아 웃통을 벗었다. 일본도로 스스로 배를 갈랐다. 뜻을 같이했던 동료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쳤다.

삼류 사무라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런 일을 감행한 자의 이름은 미시마 유키오. 도쿄대를 졸업하고 고시 패스를 거쳐 1949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등단했다. 30대에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될 만큼 일본 전후 문학의 총아였다.

그는 덴노(일왕)주의자이자 극우 사상가이기도 했다. 공안 투쟁으로 뜨거웠던 1960년대 학생운동을 좌우 가리지 않고 질타했다. 일본 학생운동 역사의 분수령이었던 19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령 사건이 일어나자 바리케이드를 뚫고 혈혈단신 강당으로 난입했다. 몇백 명과 홀로 대담을 벌였다. 엘리트이자 천재였으며 풍운아이자 ‘똘아이’였다.

격동기의 일본 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인 그가 인질극 끝에 할복자살한 이 날을 일본에서는 ‘미시마 사건’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관공서에서 인질극을 벌인 후 할복하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TV가 실시간으로 난리 난 건 당연했다.

바로 그 무렵, 고양이와 함께 도쿄에서 사는 엔도 켄지라는 남자가 집에서 카레라이스를 끓이고 있었다. 고양이는 곁에서 야옹거린다. 감자와 당근을 다듬다가 손을 베이기도 하며, 그렇게 평범한 저녁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TV에서 들려온 미시마 사건.

대개 충격적인 뉴스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복잡한 상념에 휘말려 든다. 평정은 사라지고 감정은 요동친다. 우리가 몇 달 동안 겪고 있듯 말이다. 카레라이스를 만들고 있던 엔도 켄지의 직업은 음악가였다. 훗날 ‘불멸의 남자’라는 별명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하게 된 신인이었다.

1947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 엔도 켄지는 밥 딜런의 명곡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을 듣고 포크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60년대 교토대를 중심으로 간사이 지역에서 발원한 일본의 포크 문화는 학생운동과 맥락을 같이했다. 무라카미류의 소설 ‘69’에 잘 묘사된 것처럼, 청년 여가 문화를 대표하는 음악이 비틀스에게 영향을 받은 로큰롤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이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서구의 그것과 흐름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밥 시거, 존 바에즈 등이 반전을 외치는 젊은이들과 함께하며 프로테스탄트 포크 운동을 벌였던 일을 떠올려 보라. 미국 동부의 대학생 그룹과 일본의 운동권 학생은 같은 시간대를 살았다. 서구 포크에 일본 민속음악적 색채를 더하며 일본 포크의 창시자로 불리는 포크 그룹 크루세이더스를 비롯한 많은 포크 뮤지션이 풍자 또는 직설로 1960년대 일본 사회를 비판했다. 학생운동권이 그들과 호응했다. 집회 현장에 늘 포크 뮤지션의 공연이 열렸다. 포크 뮤지션의 공연은 곧 집회였다.

1967년 교토에서 열린 페스티벌 ‘포크 캠프’는 음악 공연과 토론회를 결합한, 일본 진보와 청년 문화를 아우르는 행사였다. 포크 캠프는 짧은 시간에 도쿄와 교토 양쪽에서 열리는 행사로 커져 나갔다. 1969년, 교토 야마자키에서 3회 포크 캠프가 개최됐다. 다양한 성향의 포크 음악가에게로 문호를 넓혔다.

이 행사에 참여한 엔도 켄지는 여기서 기존의 포크 음악가들과 연을 맺었다. 탁월한 기타 솜씨와 시적 가사 그리고 나긋나긋한 보컬이 다른 이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의 소개로 레이블과 계약했다. 같은 해 ‘고양이가 자고 있다(猫が眠ってる)’로 데뷔했다. 첫 앨범까지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렀던 그의 처지를 1971년 발매한 ‘만족할 수 있을까(満足できるかな)’가 바꿨다. 이 앨범에 실린 ‘카레라이스(カレーライス)’가 이듬해 10만 장이 팔렸다. 일본 포크의 첫 히트곡으로 기록됐다. 당시 일본 방송은 불온한 음악이라는 이유로 포크를 틀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놀라운 기록이다.

‘카레라이스’는 미시마 사건 당시, 자신이 준비하고 있던 저녁을 박제한 노래다. 아르페지오로 전개되는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엔도 켄지는 나른하게 노래한다. 성찰적인 멜로디와 창법은 지금의 서울 홍대 앞 여느 싱어송라이터가 신곡으로 발표한다 해도 위화감이 없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담백한 진액이다.


‘카레라이스’로 활동하던 시기의 엔도 켄지. 사진 엔도 켄지 공식 홈페이지
‘카레라이스’로 활동하던 시기의 엔도 켄지. 사진 엔도 켄지 공식 홈페이지

어찌할 수 없는 일상에도 계속되는 노래

그 노래의 가사 후반부는 이렇다. “고양이가 시끄럽게 울면서 나를 따라다니네 / 자기에게도 빨리 달라고 야옹야옹 / 음~ 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 나는 빈둥거리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네 / 누군가가 자신의 배를 그었다네 / 음~ 많이 아프겠네 / 음~ 카레라이스”. 미시마의 할복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건조한 한 줄의 사실과 소회로 끝낸다. 무심한 목소리와 차분한 멜로디로.

비록 영웅의 죽음은 아니었지만 폭주하던 일본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런데도 일상의 작은 배경에 머문다. 미시마의 할복은 1절 가사에 묘사되는 상황과 대구를 이룬다. 감자와 양파를 썰다가 손을 베인 내용과 말이다. 그 건조함에 섬뜩하기까지 하다. 일말의 상념도 흔들림도 없다. 냉소마저 느껴진다. 따뜻한 냉소다. 가사만으로는 와닿지 않을지 모른다. 음악과 함께 듣는다면 공감하리라.

폭력을 거듭하며 끝물에 이르고 있던 일본 사상 투쟁에 대한 염세일까. 1969년 12월 총선에서 자민당의 승리로 끝난, 10년 안보 투쟁의 허탈감일까.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나봤자…’라는 심정의 허무일까. 알 수 없다. 다만 1970년 11월 25일의 엔도 켄지는 저녁 식사를 위해 카레라이스를 준비했다.

“아프겠네”라는 한 마디와 함께 고양이를 곁에 두고 카레라이스로 저녁을 먹었을 것이다. 다음 날을 위한 따뜻한 온기를 배에 채워 넣었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시대에서 최선을 다해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계속되는 삶을 위한 원동력임을 엔도 켄지는 노래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나의 카레라이스를 만들려고 한다. 분노에만 매몰돼 있지 않으려 한다. 잡혀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동네 편의점에 갈 때도 마스크 착용을 잊지 않으려 한다. 취소된 약속의 시간을 음악으로 채우고, 차분한 마음으로 생존을 도모하려고 한다. 분노와 절망에 함몰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의연하게 나의 카레라이스를 만들려고 한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