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여인’ 촬영 당시 23세였던 줄리아 로버츠(오른쪽)는 큼직하고 시원한 미소로 수많은 남성의 여신으로 자리매김한다. 40대 초반의 리차드 기어도 완숙한 신사의 매력을 뽐내며 여성 관객의 로망을 완성해준다.
‘귀여운 여인’ 촬영 당시 23세였던 줄리아 로버츠(오른쪽)는 큼직하고 시원한 미소로 수많은 남성의 여신으로 자리매김한다. 40대 초반의 리차드 기어도 완숙한 신사의 매력을 뽐내며 여성 관객의 로망을 완성해준다.

거리의 여인이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성공한 미남 사업가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할 확률은 얼마쯤 될까.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을 확률이나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보다 높을까, 낮을까? 괴물을 물리친 왕자가 공주와 결혼해서 오래오래 잘살았다는 동화에 뿌리를 둔 로맨틱 코미디물의 인기는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귀여운 여인’에 이르러 정점을 찍는다.

주인공 비비안은 꿈을 찾아 할리우드로 갔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녀가 돌고 돌아 잠시 멈춰 선 현실은 거리의 여자.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을까, 자문해 보기도 하지만 자책하지는 않는다. 자기 연민만큼 못나고 나약한 건 없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일이지만 내 힘으로 돈을 모아 인생을 다시 시작하리라, 비비안은 마음을 다진다.

그날 밤도 비비안은 백마 탄 왕자님이 자신을 구하러 올지 모른다는 꿈을 안고 거리에 나선다. 어쩌면 공주인 자신이 위기에 빠진 왕자를 구할 수도 있으리라. 유치한 것 같지만 왕자와 공주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자긍심, 비비안의 자기 사랑이다. 그리고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급 승용차를 탄 멋진 신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남들이 보기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인생, 그러나 에드워드는 끝없이 반복되는 전략 회의와 사교를 위해 벌어지는 파티에 질식할 것만 같다. 최고경영자(CEO)란 사실 수많은 직원의 현재와 미래를 등에 지고 외줄을 타듯 매일 매 순간, 중대한 선택을 하면서도 힘들다, 어렵다, 못 하겠다, 내색 한 번 할 수 없는 자리 아닌가. 에드워드는 숨이라도 크게 쉬고 싶어 무작정 뛰쳐나왔지만, 출장 온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만다. 운전기사도 없이 변호사의 수동식 승용차를 빌려 탄 터라 가속기와 브레이크도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인생의 방향과 제어 능력을 얼마쯤 상실한 채 우연히 비비안 앞에 멈춰 선 것이다.

비비안의 도움으로 투숙하고 있는 호텔에 무사히 도착한 에드워드는 팁만 주고 그냥 보내려던 마음을 바꿔 그녀와 밤을 보낸다. 귀엽고 천진하게 잘 웃는 여자, 잘생기고 돈 많고 매너 좋은 남자가 호감을 나누긴 했지만, 하룻밤 이상의 관계가 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인수‧합병을 준비하며 상대 기업의 대표와 만날 예정이었던 에드워드는 여자를 동반하는 게 험악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에 도움 될 거라는 변호사의 조언을 듣고 일주일간 사업 파트너로 같이 있어 줄 것을 비비안에게 제안한다. 전화 한 통이면 달려올 근사한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길들지 않은 비비안의 매력이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다는 걸 알아본 것이었다.

며칠간이나마 밤거리를 헤매는 대신 최고급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에드워드와 함께 지낼 수 있는 행운을 비비안은 기쁘게 수락한다. 그러나 행복의 여신이 내 편이 된 것 같다는 우쭐함도 잠시, 드레스를 사러 간 로데오 거리에서 그녀는 에드워드가 준 현금을 한 움큼 쥐고도 문전박대당한다. 늦은 밤, 뒷골목에서는 익숙하게 견뎌낸 모멸감이었지만 환한 대낮, 명품 숍 직원들이 노골적으로 던지는 경멸은 그녀를 어느 때보다 움츠러들게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에드워드와 맺은 계약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약속한 시각, 아름다운 모습으로 에드워드 앞에 선다.

그는 명품 거리에 함께 나가 그녀가 당한 설움을 씻어주고 자선 폴로 경기에도 자랑스러운 듯 데려간다. 전용 비행기를 타고 가서 오페라도 함께 즐긴다. 귀공자와 매춘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가 ‘나를 사랑해주세요’를 부르는 장면에서 이탈리아어로 된 가사를 알아들을 리 없는 비비안이 감동의 눈물을 흘릴 때, 그는 사랑에 빠진다. 

비비안이 에드워드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가는 동안 그녀의 밝고 순수한 천성은 앞만 보고 달려온 에드워드를 멈춰 서게 한다. 누군가 평생을 바쳐 키워온 기업을 재정 상태가 약해진 틈을 노려 헐값에 매입한 후 비싸게 팔아 이익을 챙겨도 되는 것일까, 에드워드는 자문한다.

급하게 커브를 돌면 사고가 나듯, 인생의 방향을 바꾸려 할 때 세상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사업 방침을 수정하면 눈앞의 기업 이익이 감소하고 임원과 사원에게 돌아갈 수익도 줄어든다. 화가 난 변호사는 에드워드를 변화시키고 있는 비비안이 매춘부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주 쉽게 그녀를 모욕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는 비비안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계속 만나고 싶다고 돈도 주고 아파트도 사주겠다고, 에드워드는 말한다. 그러나 비비안은 거절한다. 돈 받고 자신을 파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돈을 받은 대가가 아닌, 동등하게 마주 보며 에드워드를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에드워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비비안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겠다며 떠나간다.


줄리아 로버츠와 리차드 기어의 매력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주로 만든 게리 마샬 감독이 1990년에 발표해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당시 23세였던 줄리아 로버츠는 큼직하고 시원한 미소로 진부한 스토리와 이런저런 논란을 집어삼키며 수많은 남성의 여신으로 자리매김한다. 40대 초반의 리차드 기어도 완숙한 신사의 매력을 뽐내며 여성 관객의 로망을 완성해 준다. 화면 가득 흐르던 음악을 찾아 들으며 영화의 여운을 이어 가는 것도 즐거운 경험일 것이다. 

페미니즘·젠더·성매매 문제를 끌어와 비판하는 목소리도 지금은 있겠지만 ‘귀여운 여인’은 사랑 이야기도 사업 이야기도 판타지, 가볍게 보고 즐겨도 좋을 연애 영화다. 그래서 오히려 인생은 살 만한 것, 사랑할 만한 것, 바라고 꿈꾸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라고 영화는 마음껏 외친다. 현실이란 각박한 것, 무자비한 것,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 인간이란 야비한 것, 속고 속이며 좀비가 되어 가는 희망 없는 존재라고 외치는 최근의 많은 영화와는 대조적이다.

에드워드가 비비안에게 그랬듯, 사랑은 상대가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비비안이 에드워드에게 그랬듯, 사랑이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잠시 쉬게 해주고 웃게 해주고 응원해주는 일이다. 동시에 자신도 성장하는 일이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자신의 가치를 믿는 공주의 품격, 어떤 고난에서도 인간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왕자의 품성만이 서로를 키워주는 사랑을 허락한다. 그런 사랑만이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한 세상으로 변화시킨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