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은 자연과 역사뿐 아니라 민족의 해학을 품은 즐거운 고장, 송구영신 새해맞이 여행을 떠나기 좋다. 사진 이우석
영월은 자연과 역사뿐 아니라 민족의 해학을 품은 즐거운 고장, 송구영신 새해맞이 여행을 떠나기 좋다. 사진 이우석

“술 잘 먹고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이더니 술 못 먹고 돈 못 쓰니 적막강산일세.”

“돈 없어 술도 못 마시는 떼꾼을 누가 알아주리오.”

적막한 산수. 목재와 땔감을 엮어 뗏목으로 사람을 나르며 돈을 벌던 떼꾼 아리랑도, 동강을 휘감아 치던 래프팅 소리도 머나먼 메아리로 사라졌다. 이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은 영월에 고요하고 청량한 기운만 감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을 기원하며 신년을 맞는 일출 여행지도 좋지만, 내륙 산간 어느 고을도 새해 무운을 바라기에 딱 맞다. 강원도 영월(寧越), ‘편하게 넘는다’는 뜻이니 고난투성이인 요즘 같은 시대에 이보다 좋은 뜻도 드물다.

심산유곡(深山幽谷) 영월 땅엔 유독 해학 서린 이야기가 많다. ‘아재(아저씨의 사투리) 개그’의 시조 격인 김삿갓과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전통 민화 등 재미난 ‘거리’들이 모여 있다. 영월군 김삿갓면에 들어서면 그를 둘러싼 재미난 ‘옛날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문을 꼭꼭 걸어 닫은 시골 서당 훈장은 남루한 행색의 방랑객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밥을 청하는 것이었다. 훈장은 그가 그냥 돌아갔으면 했다. 이때 돌연 그를 물리칠 기가 막힌 방도가 떠올랐다. ‘서당’과 ‘학생’ ‘선생’을 넣어 시를 지으면 밥을 주겠노라 했다. ‘주제에 글이나 알겠나?’ 하지만 돌아온 시는 걸작이었다.

“내 일찍이 서당인 줄 알고 왔소, 방에는 모두 귀한 분들, 학생은 채 열 명이 안 되고 선생은 내다보지도 않는다.” 얼마나 완벽한가. 하지만 길손이 읊은 시를 들은 선생과 학생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음독하자면,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생도제미십(生徒諸未十)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이었으니 말이다.

길손의 정체는 천재적 시인, 즉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김삿갓(김병연)이었다. 이중자의시(二重字義詩), 즉 언어유희, 시쳇말로 ‘아재 개그’의 원조다. 이 형식을 응용하면 말과 글로 ‘갓(God·신)’ 중의 갓이 김삿갓이다.

이 천재 시인은 글자를 분할해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파자시(破字詩)와 현대판 랩처럼 같은 말이 반복되는 동자중출시(同字重出詩)에도 능했다. 파자시는 한자를 분해해 새로 해석한다. ‘월월산산(月月山山)’, 벗(朋)이 나가면(出) 밥을 먹겠다는 친구에게 김삿갓은 “정구죽요(丁口竹夭) 즉, 가소(可笑)롭다며 아심토백(亞心土白) 나쁜 놈(惡者)”이라 되받아쳤다.

언어유희는 요즘 ‘부장 개그’ ‘아재 개그’ 등으로 폄하되지만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장르다. 야사에는 세조가 정승 신숙주와 구치관을 두고 신(新)정승이니 구(舊)정승으로 술자리 말장난을 했다는 일화가 있고, 정조와 다산 정약용 또한 마치(馬齒)와 계우(鷄羽·겨우)로 말장난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조와 다산은 언어유희로 많은 ‘배틀’을 벌이기까지 했다. 정조가 “보리 뿌리 맥근(麥根)맥근” 하면 다산이 “오동 열매 동실(桐實)동실”로, 다시 정조가 “아침 까치 조작(朝鵲)조작” 하면 다산은 “낮 송아지 오독(午犢)오독”으로 응수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은 ‘시씨가 사자를 먹었다(施氏食獅史)’는 시가 대표적 언어유희 작품이다. ‘시씨 성을 가진 시인이 사자 열 마리를 먹었다’는 내용인데 발음이 시작부터 끝까지 죄다 ‘시(shi)’라는 하나의 발음으로 끝난다. ‘시시시시시시시…’ 100번 가까이 ‘시’만 읊는 시(詩)다. 언어학자 자오위안런이 지었다. 비상하다. 결코 ‘시시’하지 않다.

마찬가지다. 문호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pun)’는 작품 속 곳곳에 숨어들어 세상을 비판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지은 루이스 캐럴은 중요 대사를 언어유희로 채웠다. 모자 장수와 왕은 ‘차(tea)’와 알파벳 ‘T’로 말장난을 하고, 앨리스는 고양이에게 바로 쓰나 거꾸로 쓰나 똑같은 말인 ‘회문(回文)’으로 유명한 “Was it a cat I saw?”를 남긴다. 서양의 김삿갓이었다.


민화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폭포를 거스르는 잉어는 과거 합격을 뜻하는 등용문을 의미한다. 사진 이우석
민화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폭포를 거스르는 잉어는 과거 합격을 뜻하는 등용문을 의미한다. 사진 이우석

박물관 가득한 해학의 도시

연말에 웃는다는 것은 그것도 올해처럼 우울한 해엔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영월에선 다양한 해학을 즐길 수 있는데,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민화는 민초의 삶과 소망이 녹아든 그림이다. 역시 김삿갓면에 조선민화박물관이 있다. 2000년에 개장한 이 박물관에는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민화를 생각하면 단골로 떠오르는 호랑이와 까치, 꽃과 나비, 잉어 등은 죄다 허투루 그린 그림이 아니다. 모두 탄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액운을 쫓는 목적으로 까치와 호랑이·해태·용·개·닭을 그려 입구에 붙여놓았다.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 그림은 도둑을 막는다는 ‘폐쇄회로(CC)TV’ 개념이다. 그래서 자물쇠도 물고기 모양이 많다. 과일은 장수와 자손 번창을 뜻한다. 3000세를 산 전한 중기의 관료 동박삭이 먹었다는 천도복숭아도 많이 그렸다. 특히 강물을 거슬러 올라 용이 됐다는 등용문의 설화를 뜻하는 잉어는 수험생이나 취업준비생, 임원 진급을 앞둔 말년 회사원에게 좋다.

우리 선조는 민화와 함께 평생을 살았다. 나서는 수복 병풍 앞에서 돌잡이를 했고, 글을 깨우칠 나이엔 문자도(文子圖) 앞에서 천자문을 외웠다. 장성해선 화조도(花鳥圖) 병풍 앞에서 초야를 보내고, 늙어선 노안도(蘆雁圖) 앞에서 만년을 보냈다. 심지어 죽으면 모란 병풍 뒤에 눕는다.

박물관 2층에 올라가려면 19세 이상이어야 한다. 민화 중 가장 은밀한 성 이야기를 담은 춘화(春畵)가 따로 전시되어 있다.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딱딱한 세상의 그늘 속에서 쉬쉬하며 보던 ‘19금 성인물’이다. 혜원 신윤복도 단원 김홍도도 많이 그렸다지만, 당시 처벌이 두려운 탓이었는지 대부분의 춘화에는 작가 이름이 따로 없다. 그림은 작다. 몰래 봐야 하고 꼭꼭 숨겨놓기 좋도록 ‘포켓북’으로 유통됐다. 기본에 충실했다. 인간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에로 비디오물처럼 다양한 상황과 설정이 있고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그림이 나름 적나라하다. 편견과는 달리 조선 시대도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영월은 박물관의 도시로 불린다. 2000년대 초·중반 당시 중앙 정부는 지방의 자립과 자급을 위한 주문을 했고, 영월은 박물관을 택했다. 이후 사설 박물관 건립을 지원해 현재 20여 곳에 박물관을 둔 메카로 성장했다.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소장,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박물관 김삿갓문학관은 태백산의 끝과 소백산이 시작하는 지점에 있다. 김삿갓이 살았고 죽어 묻힌 곳이다. 묘와 상징 조형물, 시비(詩碑)를 볼 수 있으며 문학관에선 그의 일대기와 작품 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호안다구박물관은 다구(茶具·차를 달여 마시는 데 쓰는 기구)를 통해 차 문화를 배울 수 있는 박물관이다. 차와 관련된 신기한 작품과 유물을 볼 수 있으며 다례 및 제다 실습을 해볼 수 있다. 조선민화박물관에서도 민화를 그리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탓에 사전에 확인이 필요하다.

이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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