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고악기 컬렉션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하프시코드. 하프시코드는 피아노의 전신이자,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가장 번성한 건반 악기다. 사진 안종도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고악기 컬렉션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하프시코드. 하프시코드는 피아노의 전신이자,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가장 번성한 건반 악기다. 사진 안종도

사람들이 붐비는 독일 함부르크 중앙역 역사를 종종걸음으로 가로지른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고 다소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곧바로 역사를 빠져나와 흩날리는 비를 맞으며 길을 건넌다. 이윽고 눈앞에 커다란 네오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나타난다. 한여름 밝은 햇살 아래에서는 건물에 조각된 장식들이 화려하게 빛나 꽤나 멋있게 보였지만 우중충한 겨울 하늘 아래에서는 빛을 잃고 조용히 잠에 든 것처럼 보인다.

발길을 옮겨 약속이 있는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Museum für Kunst und Gewerbe)으로 향했다.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은 라이프치히, 빈, 베를린에 이어 독일어권에서 네번째로 개관한 예술 산업 박물관이다. 당시 빈 및 런던 박물관에 자극받은 함부르크 지식인층이 박물관 개관을 위해 기부 모금 운동을 벌였고 예술 상공업의 진흥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1874년 개관한 이래 현재 50만 점이 넘는 작품을 보유, 전시하고 있다.

연주가가 왜 뜬금없이 예술 산업 박물관을 소개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겠다. 사실 이곳에는 수백 년 역사를 가진 고악기 컬렉션 전시실이 있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고악기인데, 대부분의 악기는 연주가 가능한 상태로 보존이 잘돼 있다. 이 때문에 고악기 컬렉션 전시실에 있는 악기를 활용해 연주회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필자도 다가오는 3월 이곳에서 열릴 고악기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고악기 컬렉션 전시장은 독일이 낳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스 폰 뷜로’로부터 시작됐다. 한스 폰 뷜로는 1890년 60세 생일 기념으로 함부르크시로부터 1만마르크의 현금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다가 그의 친구 요하네스 브람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브람스의 조언을 들은 그는 헨델 연구가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크리산더를 통해 17세기 고악기를 구입해 박물관에 기증했다. 고악기 컬렉션 전시장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 덕분에 규모를 키워왔다. 2000년에는 함부르크의 저명한 음악학자 뵈르만 박사가 평생 수집해온 건반 악기 컬렉션을 기증했고 이후로도 악기 수집가의 기증이 이어져 박물관 컬렉션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고악기 컬렉션 전시장에서는 고악기를 활용한 연주회도 열린다. 사진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고악기 컬렉션 전시장에서는 고악기를 활용한 연주회도 열린다. 사진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많은 이의 애정이 담긴 고악기가 전시된 이곳은 별천지 같은 세상이었다. 광택 나는 대리석 바닥 위에 놓인 수많은 하프시코드, 포르테 피아노 그리고 현대 그랜드 피아노까지 500년의 건반 악기 역사를 아우르는 모든 악기가 조명 아래 빛났다. 게다가 이 악기들은 수백 년 전 제작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원형 및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건반을 누르면 당시 사람들이 즐겼던 소리의 즐거움을 지금도 만끽할 수 있다.

큐레이터와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전시실을 둘러본다. 그러다 유독 눈에 띄는 악기가 있다. 바로 1787년 파리에서 파스칼 타스킨이 제작한 하프시코드다. 19세기 최고의 하프시코드 중 하나로 손꼽히며 현재도 이 악기를 본보기로 많은 하프시코드가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검은색 바탕에 화려한 금장식과 더불어 악기 덮개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까지, 실제로 눈으로 보니 그 감동 또한 대단하다.

조금 고개를 돌려보니, 1755년 네덜란드산 하프시코드와 17세기 중엽의 작자 미상인 프랑스산 하프시코드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큐레이터에게 직접 쳐봐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러본다. ‘혹여나 부서질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았다. 고혹적인 소리의 아름다움을 떠나 300년 전에 장인이 정성스럽게 깎아서 다듬어 놓은 나무 건반의 촉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시공간을 초월해 이 악기를 쳐봤을 법한 옛 음악가들과 교감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 또한 현대 기술의 정밀함이 결코 전달할 수 없는 감성이 느껴진다.

큐레이터에게 진심이 섞인 농담도 건네봤다. 내가 당신이라면 여기서 평생 일하고 연주하면서 살 수 있겠다고 말이다. 따뜻한 마음을 안고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을 나온다. 다시 회색 하늘 아래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걷지만 잠시 이 코로나19가 주는 걱정을 떠나 악기가 전해주는 천상의 아름다움 한가운데를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루빨리 상황이 좋아져 우리 모두 건강하게 일상에 복귀하고 연주회도 다시 열릴 수 있길 기원해 본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고악기 컬렉션 박물관

박물관 앱 ‘MKG Musik instrumente’를 통해 악기 소리와 연주회를 즐길 수 있다. 사진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박물관 앱 ‘MKG Musik instrumente’를 통해 악기 소리와 연주회를 즐길 수 있다. 사진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 고악기 컬렉션 전시장은 총 2층으로 구성돼 있다. 약 700여 점의 악기가 전시돼 있다. 크리스티안 첼, 파스칼 타스킨의 18세기 하프시코드 명작을 비롯해 19세기의 에라르, 브로드우드와 같은 피아노 그리고 20세기의 현대 스타인웨이 피아노까지 총 500여 년의 역사를 망라하는 악기를 볼 수 있다.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은 현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폐쇄된 상황이다. 다만 박물관 애플리케이션(앱) ‘MKG Musik instrumente’를 통해 악기 소리를 방 안에서도 손쉽게 감상할 수 있다. 앱을 활용해 함부르크 음악·연극대학 학생들의 고악기 연주회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