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리도록 푸른 울진 앞바다. 사진 이우석
눈이 시리도록 푸른 울진 앞바다. 사진 이우석

누가 어디 여행만 한다면 괜한 난리를 치는 이들의 눈길도 거칠게 느껴진다. 맞다. 그런 상황과 거리를 두고 싶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간다. 추운 날이 계속될수록 뜨거운 울진의 온천이 그리워진다. 눈동자처럼 딱딱 박힌 두 개의 온천, 덕구와 백암이다.

길도 좋아졌다. 몇 년 전 당진~영덕 간 고속도로가 생겼으니 상주~영덕 구간을 통해 가면 서울에서 4시간 남짓이다. 과거엔 6시간은 족히 걸렸다. 울진은 바다와 맞붙은 도로가 100㎞ 가까이 이어진다. 겨우내 바다 결핍에 시달려온 나는 그런 길은 달려도 달려도 지겹지 않다.

푸른 바다 울진은 붉은 해가 뜨는 곳. 두 가지 원색의 접점을 향해 달리는 발길이 바쁘다. 한없이 푸른색과 기암괴석의 갯바위가 늘어선 울진의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앞만 보고 달린다. 고불고불 휘돌며 육지와 바다를 가르는 해안도로. 바다에 빼죽 빼죽 솟아난 조각품 같은 바위와 그 위를 살포시 덮어싸는 금침의 파도가 간간이 시선을 빼앗을 뿐 멈춰 세우고 싶지 않다.

미리 말하자면 울진에는 세 가지 해가 있다. 하나는 푸른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日)요, 또 하나는 역시 그 푸른 바다에서 기어 나오는 붉은 게(蟹)다. 억지스러운 감은 있지만, 마지막 해는 많은 것을 해(施)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후포항에 도착했다. 후포항엔 바다와 매우 가까운 커피 전문점이 있다. 해변으로 커피를 들고 나가 눈부신 윤슬로 가득한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원두 향 즐기는 기분은 서울에선 감히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바다와 산과 계곡을 모두 품은 울진에서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낚시는 물론이며 송림 해변 산책, 숲길 트레킹, 스쿠버다이빙까지 모두 즐길 수 있다. 볼 것도 많다. 바로 붙어 어깨를 맞댄 길을 향해 하얀 혀를 날름대는 짙푸른 바다는 아침이면 시뻘건 불덩이를 토해내고 밤에는 영롱한 어화(漁火)를 그대로 비춰낸다. 빨래 대신 반투명한 오징어를 말리는 풍경도, 갯바위에 홀로 서서 바다와 싸우는 낚시꾼의 힘찬 스윙도 눈에 담는다. 이 중 최고는 온천욕이다. 후포항 인근에는 국내 대표적 유황온천인 백암온천이 있다. 유람 따로 온천 따로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설원과 겨울 바다를 보며 온천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이다. 용출온도 51도의 백암온천수는 방사능 온천으로 강한 알칼리성을 띤 매끈한 촉감 때문에 인기를 끈다. 한화리조트 등 숙박시설도 많고 후포항 먹거리 타운과 가까워 좋다.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각종 자료와 시설물을 통해 온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는 온천 학습장도 있다.

읍내와 가까운 덕구온천도 좋다. 강아지 이름을 닮은 이 온천은 응봉산 산마루에서 저절로 뿜어나오는 국내 유일 자연용출 온천이다. 용출 온도 42.4도의 약알칼리성 물이 땅에서 치솟아 오른다. 탕치 효과가 좋다고 소문났다. 신경통, 류머티즘성 관절염, 근육통 등 외과성 질환을 비롯해 중풍, 당뇨 등 내과성 성인병이나 피부 질환, 미용 등 피부과 담당 항목까지 좋은 효능이 있다고 얘기한다. 설명만 듣고 보면 거의 아스피린 격이다.

대중목욕탕은 그 역사가 짧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다. 로마나 모헨조다로 심지어 경주 등에도 목욕탕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대중목욕탕은 19세기 초에 생겼다. 덕구온천 대욕장은 딱 대중목욕탕처럼 생겼는데 많은 이가 뜨거운 물 안에서 꼬막처럼 몸을 데치고 있었다. 이 계절에 수비드(저온 조리) 수육처럼 몸을 데우다 보면 황제가 따로 없다. 온천욕의 단점은 오래 있기에 답답하다 느끼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이곳엔 야외로 향하는 테라스가 있어 냉온 교대욕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울진의 명물인 왕돌회수산 대게찜. 사진 이우석
울진의 명물인 왕돌회수산 대게찜. 사진 이우석

온천탕만큼 좋은, 마시는 탕

울진 온천탕의 좋은 점은 그 풍경과 물의 효능뿐만이 아니다. 목욕 후 즐기기 좋은 또 다른 탕이 남아 있기에 흐뭇하다. 홍게며 곰치며, 우럭 등을 뜨끈하게 끓여 낸 탕(湯)이다. 울진의 맛있는 생선국은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뜨끈한 ‘국물’은 겉에도 속에도 좋다.

덕구 옆에는 죽변항이 있다. 동해안 곰치국은 해장에 으뜸이다. 술꾼의 생리를 알면 이해가 쉽다. 해장의 원리는 수분과 단백질의 원활한 공급인데, 곰치국은 이에 딱이다. 지방이 거의 없다. 게다가 속이 부대끼면 씹고 소화하기 어려운데, 곰치국은 훌훌 마시면 그만이다. 그저 순두부가 물고기 모양으로 돌아다닌다 생각하면 된다.

곰삭힌 김칫국물을 넣고 팔팔 끓여 시원한 맛도 좋다. 밥을 말아 죽 마시면 술을 머금고 있던 위장 속 융털이 일제히 휘날리며 알코올을 뱉어낸다. 비로소 간이 힘차게 움직인다.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난 후 당장이라도 소주 한 병쯤은 마실 수 있을 만큼 해장(解腸)이 빠르다.

백암 인근 후포항에선 대게를 먹어야 한다. 이것은 겨울 울진 여행을 온 사람이 지는 의무이며 운명이다. 식당(왕돌회수산) 앞 가마솥은 이미 김을 펄펄 뿜고 있다. 저 안에는 게가 들었다. 겨울의 진객 대게와 붉은대게(홍게)가 바다를 떠나 눈앞에 와 있다.

대게는 딱히 설명할 것도 없다. 꽃게와는 다르다. 맛있지만 껍질이 단단한 꽃게는 속칭 ‘인건비’가 나오지 않는다. 이로 물어뜯다가 앞니 사이에 껍질이 낀다면 손오공 머리띠를 5개 이상 쓴 것 같은 지옥을 맛보게 된다. 반면 대게와 붉은대게는 껍질이 얇다. 다리를 하나씩 뜯어 죽 뽑아내면 ‘맛살’ 같은 것이 나오는데 그냥 입에 넣고 빨아들이면 된다. 딱지 부분의 하얀 살은 조금 귀찮지만 나름대로 방법이 있다. 젓가락으로 살살 긁어내 딱지 안에 모아놨다가 한 번에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입에 한 보따리를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자면 게가 아니라 ‘계’를 탄 듯 그 만족감이 대단하다.

마지막으로 따끈한 붉은대게탕과 함께 곁들여 먹는 게딱지볶음밥은 이미 수북한 껍질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대게 맛의 여운을 보장하는 일종의 보장성 보험이다.

휴식과 보양의 울진 여행, 또 가란대도 어찌 마다할까.


▒ 이우석
놀고먹기 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전 여행기자협회 회장


여행수첩

온천 덕구온천스파월드는 관광호텔과 대욕장·스파월드·한식당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춘 종합온천휴양지다. 가족탕도 따로 마련됐다. 백암온천 단지에선 한화리조트 대욕장이 가장 크다.

맛집 후포여객터미널 앞 왕돌회수산은 가마솥에 쪄낸 대게와 붉은대게·문어·방어 등 맛있는 지역 해산물을 차려내는 집이다. 곰치국은 죽변항 우성식당이 잘한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문어볶음도 별미다. 오징어도 낙지도 아니고 문어볶음이다. 매콤한 양념에 부드러운 문어를 볶아 밥을 비벼 먹으면 딱 좋다. 죽변항 제일반점은 비빔짬뽕밥을 대표 메뉴로 내는 중국집.

숙소 평해읍 거일리에 있는 바다목장 펜션은 운치 있는 통나무집이다. 잠자리에서 일출을 바라볼 수 있는 조망과 위치가 좋아 많은 가족·연인이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