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망 피지털쇼. 사진 발망
발망 피지털쇼. 사진 발망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패션업계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패션쇼다. 패션업계가 오프라인 패션쇼를 열기 어려워지자 현실과 가상이 조화된 ‘피지털(physical+digital·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절충안)’이라는 대안을 찾아 나선 덕분이다.

패션쇼의 변화는 지난해 2~3월부터 시작됐다.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빠르게 번지는 상황에서 밀라노 패션위크를 강행하자 비판이 일었기 때문이다. 패션위크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조르지오 아르마니 패션쇼는 당일인 2월 23일 오전 갑자기 ‘관중 없는 패션쇼’로 바뀌고 온라인으로 생중계됐다. 패션업계 가장 화려한 축제의 순간이 멈추자 모두가 비관했고 탄식했다.

그러나 곧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패션쇼 일정과 트렌드 발표 시기, 다양성의 부족, 패션쇼가 만드는 불필요한 소비와 에너지 낭비 등 낡은 관행과 제도에 대한 아우성이 폭발했다. 이전까지 시대에 따른 혁신과 변화가 필요함을 모두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용기 내기 어려웠지만,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한목소리를 낼 기회를 준 셈이다.

가장 큰 변화는 패션쇼의 캘린더다. 그간 가을·겨울 시즌 의류는 1~3월 패션쇼에서, 다음 해 봄·여름 시즌 의류는 8~10월 패션쇼에서 공개돼왔다. 이는 패션 소비자보다 바이어들에게 맞춰진 스케줄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아날로그 시대만 하더라도 6개월 전 패션쇼를 통해 바이어들의 수주에 따라 생산하는 시스템이 합리적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에서는 실제 패션 소비 사이클과 시차가 커서 비효율적이었다.

드리스 반 노튼을 비롯한 많은 디자이너는 코로나19를 전환점으로 2월에 봄·여름 시즌 패션쇼를, 8월에는 가을·겨울 패션쇼를 여는 스케줄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앞장서서 ‘탈시즌제 컬렉션’을 선언했다. 그는 연간 5번 열리던 패션쇼를 2번으로 줄인다고 발표했다.

패션 브랜드는 피지털 패션쇼를 통해 미래를 앞당기기도 했다. 발렌시아가는 패션쇼 역사 최초로 맞춤형 비디오 게임을 통해 패션쇼를 펼쳤다. ‘애프터 월드: 더 에이지 오브 투모로(Afterworld: The Age of Tomorrow)’라는 이름의 비디오 게임은 총 5가지 레벨로 구성됐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뎀나 바잘리아는 “앞으로는 패션쇼도 더 많은 관객을 만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중의 한 가지 방법인 비디오 게임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아주 명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콩고 출신 디자이너 아니파 음부엠바는 3D 모델들과 함께 인스타그램 라이브 쇼를 통해 하니파의 패션쇼를 펼쳤다.

로에베는 디지털과 피지컬을 잔잔하게 조화시킨 피지털 패션쇼로 갈채를 받았다.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2021년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을 ‘쇼 인 어 박스(Show In A Box)’라는 하나의 작은 상자 안에 담았다. 컬렉션에 대한 영감부터 모든 창작 과정을 박스 하나에 담았는데, 디지털로만 만나야 하는 패션쇼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뛰어난 대체품이 됐다. 이와 함께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브랜드 이미지도 함께 높여줬다.

로에베 쇼인어박스. 사진 로에베
로에베 쇼인어박스. 사진 로에베
구찌 피지털쇼. 사진 구찌
구찌 피지털쇼. 사진 구찌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새로운 피지털 패션쇼 경험을 위해, 드론을 띄웠다. 숲속에 모델들이 워킹하는 런웨이를 설치하고, 드론을 사용해 모델들의 이동을 쫓게 했는데, 마치 모델들과 함께 숲속 미로를 헤쳐 나오는 듯한 가상 체험을 선사했다.

발망은 가상으로 파리의 패션쇼장을 직접 찾을 수 없는 해외의 VIP들을 위해 TV 스크린을 설치했다. LG전자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TV가 전 세계 VIP들을 발망 패션쇼장으로 모았다. ‘프론트 로(front row·패션쇼 관람석 맨 앞줄의 VIP석)’의 첫 줄부터 셋째 줄까지 LG전자의 OLED TV 58개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VIP가 패션쇼장에 참석한 듯한 느낌을 줬다. 유명인들은 실제 패션쇼장에 참석했을 때처럼 한껏 차려입고 TV 속 모델들의 워킹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스마트폰으로 마음에 드는 의상을 촬영하고 피날레 때는 손뼉을 치는 등 마치 패션쇼 현장에 있는 듯 행동했다.

피지털 패션쇼로 패션쇼 VIP 문화를 바꾼 브랜드도 나온다. 그간 봄·여름과 가을·겨울 시즌으로 나누어 매년 개최되던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의 세계 4대 패션위크는 쇼장에 갈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와 같았다. 유명 패션지의 편집장과 패션기자들, 유명 바이어, 셀러브리티 등은 한껏 차려입고 쇼장 입구에서부터 몰려드는 파파라치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길게 줄을 설 필요도 없이 홍보 담당자들이나 보안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여유롭게 맨 앞자리 좌석에 앉아 쇼를 관람했다. 패션쇼가 끝난 후엔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는 백스테이지로 자유롭게 들어가 디자이너들과 포옹을 하고 기념사진 촬영을 하기도 했다. 쇼장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린 그들 사이에서도 관람석 위치에 따라 클래스가 구분됐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패션쇼의 광경은 뒤바뀌었다. 유명인사나 일반인 모두 함께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패션쇼를 관람했고, 패션쇼 후엔 패션 유명인사들 대신 각국의 학생들이 디자이너와 실시간으로 영상 통화의 시간을 누렸다. 패션쇼의 뉴노멀(새롭게 떠오르는 기준 또는 표준)이 열린 것이다.

실제로 1월 15~19일 열린 밀라노 남성복 패션위크는 피지털 패션쇼 방식으로 그간의 관행을 깬 것으로 유명하다. 프라다는 라이브 스트리밍 패션쇼가 끝나자 특별한 행사를 진행했다. 프라다의 최고경영자(CEO)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미우치아 프라다, 프라다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라프 시몬스는 영상 통화로 전 세계 학생들과 패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영상 통화 마지막에는 한국인 학생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패션쇼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지킬 것과 바꿀 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선택할지, 어떤 식으로 융합할지 눈길을 끈다. 패션쇼는 더이상 팬데믹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모델, 무대장치, 음악 등이 종합적으로 선사하는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예술과 같아서 완전히 디지털화할 수도 없다. 팬데믹이 여는 피지털 패션쇼 시대가 기대된다.


▒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 케이 노트(K_note)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