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하 KLPGA투어 경기위원장은 가장 실력있는 선수가 챔피언이 되도록 한다는 대전제하에 코스 세팅을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민학수 기자
최진하 KLPGA투어 경기위원장은 가장 실력있는 선수가 챔피언이 되도록 한다는 대전제하에 코스 세팅을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민학수 기자

골프는 타이거 우즈와 필 미켈슨이 웃통을 벗고 주먹다짐을 해 승부를 내는 스포츠가 아니다. 누가 더 힘이 센지, 누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를 가리는 경쟁도 아니다. 대개 하루 18홀씩 꼬박꼬박 나흘간 72홀에 걸친 테스트를 통해 몇 타 만에 경기를 마치는지로 순위를 가리는 경기다.

맞대결 형식으로 치러지는 매치 플레이도 매 홀 누가 더 좋은 스코어를 내는지로 승패를 따져 이긴 홀이 많은 편이 승자가 된다. 골프는 약 100만㎡(30만 평)에 조성된 대자연 속의 골프 코스에서 열린다. 결국 인간 대 인간이 아닌 ‘인간과 코스의 밀당(밀고 당기기)’이 골프라는 스포츠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많은 상금과 특전(몇 년간 투어 시드) 그리고 명예를 걸고 챔피언을 가리는 프로 골프 대회는 어떻게 코스를 준비해 골퍼들과의 ‘밀당’에 나서는 것일까? 대회장을 찾거나 TV로 시청하는 팬까지 짜릿한 흥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흥행 요소도 생각해야 한다.

매년 30개 안팎의 대회를 치르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는 4월 8일 롯데 스카이힐 CC 제주에서 열리는 롯데렌터카 여자오픈으로 올 시즌의 막을 올린다. KLPGA투어 최진하 경기위원장은 세계 골프 규칙을 관장하는 영국 R&A와 미국 USGA(미국골프협회)의 레프리 스쿨을 모두 이수하고 두 기관으로부터 최고 등급을 획득한 전문가다. 그와 함께 코스 세팅의 ‘밀당 원칙’을 살펴보았다.


장타자 늘어 3년 전보다 코스 100야드 늘려

우선 코스 세팅의 대전제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메이저 대회인 US오픈과 디오픈에서도 해본 적이 있는데, 최 위원장도 같은 답을 내놓았다. 누가 봐도 가장 실력 있는 진정한 챔피언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기 위해선 14개의 클럽을 모두 잘 구사하는지, 다양한 전략과 이를 뒷받침할 기술을 갖추고 있는지 테스트할 수 있도록 코스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근육질 선수들의 등장은 골프를 점점 더 ‘대포 경쟁’으로 바꾸고 있다. 미국의 브라이슨 디섐보처럼 1년도 안 돼 20㎏ 이상 몸집을 불리고 나와 초장타를 치는 ‘벌크업 혁명’까지 일어나고 있다. 장타가 골퍼의 중요한 능력이고 흥행 포인트라고는 해도 대회 순위가 장타 순위와 같아진다면 골프의 묘미는 반감될 것이다.

KLPGA투어도 선수들의 평균 비거리가 매년 늘고 있다. 상위권 선수들의 경우 10년 전보다 20야드가량 더 멀리 친다. 최 위원장은 “3년 전 KLPGA 정규 투어의 경우 코스 길이가 6500야드가 기준선이었는데 현재 6600야드로 가이드라인을 높였다”고 밝혔다. 티샷이 떨어지는 지점에 있던 벙커나 해저드를 아예 넘겨 치는 선수들이 늘고 있다. 파 72를 파 71이나 파 70으로 조정해 코스 길이를 길게 하는 효과를 주고 싶어도 전통이나 이미지를 중시해 반대하는 골프장들이 적지 않다.

러프 길이를 길게 하는 것도 대회 직전까지 영업하는 국내 골프장 현실에선 한계가 있다. 핀 위치를 어렵게 꽂아 버디가 쉽게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주요 대응책인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2020년 제주 세인트포 골프앤드리조트에서 열린 KLPGA투어 제주삼다수 마스터스에서는 대형 신인 유해란(20)이 KLPGA투어 72홀 최소타 타이 기록인 23언더파 265타를 기록하며 2연패에 성공했다. 세계 1위 고진영을 비롯해, 박인비, 이정은, 김효주 등 미국 LPGA투어에서 뛰는 쟁쟁한 선배들과 경쟁하면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사진 민학수 기자
2020년 제주 세인트포 골프앤드리조트에서 열린 KLPGA투어 제주삼다수 마스터스에서는 대형 신인 유해란(20)이 KLPGA투어 72홀 최소타 타이 기록인 23언더파 265타를 기록하며 2연패에 성공했다. 세계 1위 고진영을 비롯해, 박인비, 이정은, 김효주 등 미국 LPGA투어에서 뛰는 쟁쟁한 선배들과 경쟁하면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사진 민학수 기자

같은 코스라도 세팅 따라 전혀 달라져

코스 세팅은 토너먼트 수준에 맞춰 티잉 구역의 위치를 조정하고 페어웨이 폭을 좁히고 러프를 기른다. 그린 스피드를 3.5m 안팎으로 빠르게 하고 단단하게도 한다. 그래도 이미 존재하는 골프장 코스의 밑그림에 약간 덧칠을 하는 것 아닐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전체 코스의 길이나 호수, 계곡 등 골프장의 주어진 환경 자체를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코스 세팅을 통해 선수들의 정신력과 기량을 극한까지 테스트할 수 있도록 바꿔 놓을 수 있다.

블랙스톤 이천에서 열린 2020년 KLPGA투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KB금융 스타 챔피언십이 좋은 예다. 이전엔 15언더파 안팎의 스코어에서 챔피언이 결정됐는데 지난해엔 우승자 김효주(9언더파 279타)와 고진영(1언더파 287타) 두 명만 언더파 스코어를 기록했다. 출전 선수 수를 줄이더라도 메이저 대회다운 수준 높은 경쟁이 펼쳐지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난도를 확 높인 결과다. 코스 길이를 6660야드에서 6731야드로 늘리고, 러프 길이는 60㎜에서 80㎜로 늘렸다. 페어웨이 폭을 좁히고 핀 위치 난도도 높였다. 정교함을 자랑하는 김효주는 평소보다 훨씬 낮은 50% 안팎의 그린 적중률을 기록하면서도 뛰어난 쇼트게임과 퍼팅 능력으로 언더파 스코어를 만들어내 찬사를 받았다. 무조건 버디가 많이 나온다고 재미있는 대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 위원장은 “제이드 팰리스의 긴 러프와 블루헤런의 좁은 페어웨이, 블랙스톤 이천의 핀 설정을 모두 합친 코스 세팅이 가능하다면 최고로 변별력이 높은 어마어마한 코스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통 나흘간 열리는 대회 중 셋째 날 열리는 3라운드를 ‘무빙 데이(moving day)’라고 한다. 순위 변동이 심한 날이라는 뜻이다. 왜 그럴까?

R&A나 USGA는 경기 운영 매뉴얼에 라운드 내내 핀 포지션의 난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예선(1~2R)의 경우 참가 선수 규모를 보고 원활한 진행에 초점을 맞춰 티마커를 앞쪽으로 꽂아 코스 거리를 줄이거나 그린의 핀도 쉽게 꽂는다. 선수들 기량 차이도 크기 때문에 너무 어려우면 진행에 차질이 생겨 다음 날로 경기가 차례로 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선이 끝나면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끼리 3라운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예선 탈락의 부담이 없어진 선수들은 공격적인 경기를 펼치려 한다. 진행하는 쪽에서도 선수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쳐 흥미로운 경쟁 구도가 벌어지도록 유도한다. 최 위원장은 “1~2라운드 경기 진행이 충분한 변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3라운드를 가장 어렵게 세팅하고, 4라운드에서 흥미로운 순위 변동이 일어나도록 조정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