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서 즐기는 로제 와인. 사진 김상미
강변에서 즐기는 로제 와인. 사진 김상미

봄과 어울리는 와인으로 로제만 한 것이 또 있을까? 향긋한 꽃과 신선한 베리를 하나 가득 담은 듯 로제 와인 한 잔에서는 꽃향기와 과일 향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해외에서는 오래전부터 로제 와인의 인기가 날로 높아져 생산량과 소비량이 꾸준히 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수요가 그다지 많지 않다. 중후한 레드 와인에 비해 로제가 가벼운 타입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제 와인도 역사와 전통의 깊이가 레드 와인 못지않다. 음식과의 매칭 면에서는 레드 와인보다 자유롭고, 맛도 드라이한 것부터 달콤한 것까지 산지별로 다채롭다. 그렇다면 내 입맛엔 어떤 로제가 잘 맞을까? 로제 와인의 다양한 스타일을 알아보자.


우아함과 전통의 상징, 프랑스 로제

전 세계에서 로제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나라는 프랑스다. 미식으로 유명한 이 나라가 로제를 반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리고 음식 본연의 맛을 잘 살려서다. 프랑스 로제는 대체로 단맛 없이 드라이한 스타일인데 프로방스산이 가장 대표적이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프로방스 지방은 로제 와인의 최대 산지이자 우아한 로제를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로제는 레드 와인보다 열등한 포도로 만든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프로방스의 경우는 전혀 아니다. 이 지역 와인 총생산량의 3분의 2가 로제 와인이고, 가장 좋은 포도로 로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프로방스 로제는 색이 연한 것이 특징이다. 옅은 오렌지색에 분홍이 살짝 섞인 듯 빛깔이 연어 색에 가깝다. 맛은 가볍고 상큼하며 단맛이 없고 과일 향과 꽃향기의 조화가 우아하기 그지없다. 그중에서도 도멘 오트(Domaine Ott)의 방돌(Bandol) 로제는 ‘프로방스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맛뿐만 아니라 병 모양도 고급스럽다. 병 모양은 야자수를 본떴고, 바닥과 병목의 둥근 테두리들은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형상화했다. 1926년에 디자인된 병이라고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세련된 모양새다.

도멘 오트의 방돌 로제가 클래식하다면 모던한 프로방스 로제로는 위스퍼링 에인절(Whispering Angel)을 꼽을 수 있다. 로제 와인의 세계적인 유행을 주도한 이 와인은 작년에 미국의 대형 주류 판매 사이트인 미니바 딜리버리에서 와인 부문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미국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산뜻한 맛과 향으로 상당히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한 모금 머금으면 매끄러운 질감과 함께 딸기, 체리, 복숭아, 오렌지 등 상큼한 과일 향이 마치 천사의 속삭임처럼 입안을 부드럽게 채운다.

프로방스에서 서쪽으로 2시간 남짓 차를 달리면 타벨(Tavel)이라는 작은 마을에 닿는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로제 와인만 생산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그 시작은 14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타벨을 지날 때였다. 왕을 보러 나온 마을 사람들이 왕에게 와인 한 잔을 바쳤다. 루비 빛이 영롱하고 과일 향이 풍부한 와인이었다. 필리프 4세는 와인을 받아 들더니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잔을 모두 비우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타벨 로제와 프로방스 로제는 둘 다 프랑스산이지만 사뭇 다른 개성을 자랑한다. 프로방스 로제가 우아하다면 타벨 로제는 강건하다. 연한 레드 와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타벨 로제는 색이 강렬하고 과일 향도 진하다. 탄탄한 보디감에서는 타닌도 느껴진다. 그래서 타벨 로제는 해산물이나 채소보다 육류와 더 잘 어울린다. 필리프 4세 이후에도 교황들을 비롯해 루이 14세와 헤밍웨이 등 타벨 로제는 역사적인 인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와인을 “왕을 위한 로제, 로제 와인 중의 왕(Rose for Kings, King of Roses)”이라고 부른다.


감미로운 사랑의 맛, 브라케토 다퀴와 화이트 진판델

드라이한 프랑스 로제와 달리 이탈리아의 브라케토 다퀴(Brachetto d’Acqui)는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이탈리아 북서부 아퀴라는 마을에서 브라케토라는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은 사랑의 전설을 담고 있다. 전설의 주인공은 바로 클레오파트라. 그녀가 어찌나 브라케토 다퀴를 좋아했는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향할 때마다 배에 한가득 이 와인을 싣고 갔다고 한다. 선홍색이 매혹적이고 향긋한 장미 향이 코를 유혹하며 딸기와 라즈베리의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니 사랑을 속삭이며 나누기에 이보다 더 좋은 와인은 없었을 것이다.

브라케토 다퀴는 알코올 도수가 5.5% 정도로 약하고 단맛이 강해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부담 없이 마시기 좋은 스타일이다. 과일 케이크 같은 디저트와도 잘 어울리지만, 주말 브런치에 차게 식힌 브라케토 다퀴 한 잔을 곁들이면 농익은 베리 향이 온몸 가득 봄을 채워주는 느낌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로제 와인 화이트 진판델(White Zinfandel)도 달콤함이 매력적이다. 매년 미국에서 수확하는 진판델 포도의 85%가 화이트 진판델에 사용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와인은 실수에서 탄생했다. 1972년 캘리포니아주의 한 와이너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들은 진판델을 으깬 포도즙이 발효되기 전에 즙의 일부를 빼냈다. 남은 즙은 포도 껍질과 함께 발효해 진한 레드 와인으로 만들고, 빼낸 즙으로는 핑크빛이 은은한 드라이 로제 와인을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로제 와인의 발효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발효가 완료되지 않아 알코올 도수는 10%가 채 되지 않았고 포도즙의 남은 당분 때문에 와인에서는 단맛이 났다. 와인을 버리기가 아쉬웠던 와이너리는 ‘Oeil de Perdrix(앵무새의 눈)’라는 프랑스 이름과 함께 화이트 진판델이라는 영문 설명을 덧붙여 와인을 출시했다. 그런데 이 와인이 뜻밖에 대성공을 거뒀고, 미국인은 발음하기 힘든 프랑스 이름 대신 이 와인을 화이트 진판델로 부르기 시작했다.

미국인의 피크닉 와인으로도 유명한 화이트 진판델은 그야말로 다목적 와인이다. 보디감이 가볍고 과일 향이 은은해 채소, 해산물, 육류 등 어떤 음식과도 부딪히지 않는다. 초밥이나 샌드위치 등 가벼운 음식과도 잘 어울리고, 매콤한 음식과 즐기면 특유의 단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아직은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지금 주말 식사에 로제 와인 한 병 곁들여 보면 어떨까?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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