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안 하이니슈는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타인을 포착했다. 사진집에는 간혹 기차 창문의 프레임이 등장한다. 사진 김진영
다미안 하이니슈는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타인을 포착했다. 사진집에는 간혹 기차 창문의 프레임이 등장한다. 사진 김진영
독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이미지가 연결돼 진행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사진 김진영
독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이미지가 연결돼 진행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사진 김진영

한 남자가 기차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사진을 찍는다. 그의 손에는 라이카 카메라 1대, 렌즈 3개 그리고 많은 필름이 들려 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눈을 바싹 붙인 채 몇 시간이고 앉아서 셔터를 누르는 그는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다. 기차는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촬영하는 몸짓은 한발 늦어 마주친 장면을 놓칠 때마다 괴로웠지만, 놓친 이미지조차 뇌 속에 고통으로 깊이 새겨지는 듯했다. 원하는 이미지를 담아내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든 노력이 가치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는 2013년 7개월 동안 총 4번의 여행을 했다. 지난번 기차 여행이 끝난 곳은 다음번 기차 여행의 출발점이 되어 여행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여행하며 이미 지나간 길을 다시 가진 않았기에,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담아낼 기회는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마지막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코닥 네거티브 필름 120롤에 촬영된 4324장의 사진이 남아 있었다.

폴란드 출신으로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뒤 현재는 노르웨이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작가 다미안 하이니슈(Damian Heinisch)의 이야기다. ‘45(2020·MACK)’는 다미안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며 바라본 바깥 풍경을 모은 사진집이다.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가진 이 책. 제목 ‘45’는 무슨 의미인 걸까?

그의 사진은 바깥세상의 풍경을 향해 있지만, 동시에 작가의 내면과 가족사를 반영하고 있다. 다미안의 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무렵 45세 나이에 폴란드 글리비체에서 우크라이나 드발체프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세상을 떠났다. 다미안의 아버지는 정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45세 나이에 가족을 데리고 폴란드를 떠나 서독에 정착했다. 어느 날 다미안은 할아버지가 수용소로 끌려가던 절망적인 순간에 남긴 일기장을 건네받았다.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동했던 길을 따라 비슷한 루트의 기차 여정을 시작했다. 이때 그의 나이 역시 45세였다. 그렇다면 작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45세이던 때에 맞추어 기차여행을 시작한 것일까?

“1945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기차 여행을 하던 내 나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고 할아버지의 운명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978년 정부 허가를 받고 가족과 함께 폴란드를 떠났을 때의 아버지 또한 45세였다는 것을 한참 뒤에 깨닫고 닭살이 돋았다. 숫자 45의 중요성과 상징성을 깨달은 것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한참 후였다. 숫자 45는 그 자체로 동기는 아니었지만, 사진집에 있어 많은 생각과 개념적인 접근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진집 ‘45’의 표지. 사진 김진영
사진집 ‘45’의 표지. 사진 김진영
‘45’는 큰 종이에 인쇄 후 접어서 만드는 폴드(fold) 북 방식으로, 연속된 느낌을 준다. 사진 김진영
‘45’는 큰 종이에 인쇄 후 접어서 만드는 폴드(fold) 북 방식으로, 연속된 느낌을 준다. 사진 김진영
다미안 하이니슈는 풍경과 공간에 대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사진 김진영
다미안 하이니슈는 풍경과 공간에 대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사진 김진영

놀랍게도 작가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우연, 그러니까 할아버지-아버지-자신에 이르는 3세대가 모두 동일한 45세라는 나이에 기차라는 교통수단을 통해 인생에 큰 변화를 수반하는 여정을 떠났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강제적으로, 아버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다미안은 작업을 위해, 각기 다른 이유로 떠나게 된 여정이었지만, 그럼에도 3세대가 동일한 나이에 동일한 기차 여정을 했다는 사실은 이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강력한 상징으로 작동한다. 그리하여 3세대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보아온 우크라이나,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등의 풍경을 담은 이 책에는 ‘45’라는 제목이 붙게 된 것이다.

‘45’의 모든 사진은 기차 내부에서 창문을 통해 촬영됐다. 어떤 사진들에는 바깥 풍경과 함께 창틀이 이미지 안에 함께 담겨 있어, 사진가가 기차 내부에 있었다는 점을 관객에게 암시한다. 다미안은 역에서 내려 주변을 거닐며 사진을 찍는다거나 다양한 장소를 가본다거나 하는 방식을 배제하고, 오로지 일정 거리를 둔 상태에서 사람들과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방식을 택했다. 자신의 움직임을 기차 내부로만 최소한으로 제한한 덕분에 기차의 창틀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담기는 하나의 무대가 된다. 

책의 제본 방식도 독특하다. 일반적인 제본 방식으로 만들어진 사진집은 모든 종이가 재단되어 있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길 때 구조적으로 이미지가 단절될 수밖에 없다. ‘45’는 큰 종이에 인쇄 후 접어서 만드는 폴드(fold) 북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방식은 페이지를 넘기더라도 한 장의 사진을 앞장과 뒷장에 이어지게 담을 수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중간중간 하나의 이미지를 앞면에서 뒷면으로 이어지게 배치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이미지가 연결되어 진행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기차 여행과 개념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잘 들어맞는다. 독자의 손에 쥐어진 책의 물리적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만, 심리적 위치는 책장을 넘기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준다. 또한 책의 옆면은 접힌 종이의 끝부분을 보여주는데, 이 끝 면은 기차 창을 통해 수없이 펼쳐지고 지나가는, 그래서 대체로 우리가 흐릿하게 기억하는 창밖 풍경을 닮아 있다.

우크라이나 드발체프의 봄에서 시작하여 눈이 쌓인 오슬로 기차역 플랫폼의 겨울로 끝나는 ‘45’는 작가의 개인사에서 출발한 작업이지만, 이는 유럽 역사와 이에 깃든 상처를 반영한다. 유럽 내의 강제 추방이나 이주그리고 재정착의 과정 등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가족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작가는 이 작업이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자기성찰적 작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럽 역사 전반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족에 관한 개인적인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더 크고 중요한 공통의 역사와 보편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작가는 작업을 통해 깨달았다.

“겉으로 보기에 유럽의 상처는 서서히 치유된 것으로 보인다. 적대하던 나라들은 우방국이 되었고, 국경이 열리면서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전쟁에서 겪은 사건들과 참기 힘든 경험에서 비롯된 수치심은 많은 사람과 가족을 상처입혔다. 역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억압되거나 잊히고, 오직 수치심만 남아 다음 세대로 전달됐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의 할아버지, 발터 하이니슈에게” 마지막에 적힌 이 이름은 작가의 할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역사 속에서 절망을 겪은 모든 이를 대표하는 이름일 것이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