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와인은 여름철에도 알맞은 방법을 동원하면 쉽게 즐기기 좋다.
레드 와인은 여름철에도 알맞은 방법을 동원하면 쉽게 즐기기 좋다.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여름은 반가운 계절이 아니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레드 와인의 진한 맛이 부담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할 일은 아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얼마든지 와인을 맛있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게 와인 즐기기! 그 비법을 몇 가지 알아보자.

먼저 레드 와인도 시원하게 즐겨보자. 와인 상식 가운데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체로 상온을 섭씨 20~25도의 실내 온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온도에서 레드 와인을 마시면 풍미가 너무 강해져서 맛이 덜하다. 날이 더울 땐 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레드 와인이 가장 맛있는 온도는 몇 도일까? 놀랍게도 15~18도다. 어찌 된 연유일까? 과거로 돌아가 그 해답을 찾아보자.

18세기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했던 시대다. 이 시기에는 와인 양조 기술도 크게 성장했는데, 특히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의 보편화가 와인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와인을 음미하는 것이 세련된 취향의 상징이 되자,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의 중산층이 앞다투어 고급 와인을 찾기 시작했다. 집 안에 셀러를 갖추고 숙성된 와인을 즐기며 자신의 엘리트적인 면모를 과시했다. 이럴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책이었다.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련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레드 와인을 상온에서 즐기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200년 전을 상상해 보자. 난방과 단열 기술이 지금처럼 좋지 못했던 당시의 실내 온도는 15~18도였다. 레드 와인을 마시기에 적합한 온도였던 것이다. 이후 과학 기술이 발달하며 실내 온도가 높아졌지만 ‘상온’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써온 것이 탈이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가 레드 와인을 지나치게 높은 온도에서 마시고 있으니 말이다.

15~18도는 병을 손으로 만졌을 때 서늘하거나 와인을 입안에 머금었을 때 살짝 시원하게 느껴지는 정도다. 와인을 그 온도로 식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마시기 30분 전에 냉장고에 넣어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엔 문제가 좀 있다. 와인을 즐기다 보면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일 확실한 방법은 아이스버킷을 활용하는 것이다. 레드 와인을 아이스버킷에 담는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온도 변화 없이 와인을 시원하게 즐기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아이스버킷에 반드시 얼음과 물을 반반씩 섞어야 한다. 얼음만 담으면 병 표면에 얼음이 골고루 닿지 않는다. 얼음과 함께 물도 넣어줘야 차가워진 물이 병 전체를 감싸 효과적으로 와인을 식힐 수 있다.


와인 선택의 폭을 넓히자

레드 와인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화이트 와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레드 와인에 비해 화이트 와인이 너무 가볍고 신맛이 강한 것이 많아서다. 하지만 화이트 와인 중에는 레드 와인처럼 묵직하고 부드러운 것도 있다. 게다가 묵직한 화이트 와인은 닭고기나 돼지고기와도 제법 잘 어울려서 여름 보양식과 즐기기에도 딱 좋다.

레드 와인 애호가에게 추천할 만한 화이트 와인으로는 우선 오크 숙성 화이트를 들 수 있다. 레드 와인은 특유의 타닌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대부분 오크 배럴에서 숙성을 거친다. 반면에 화이트 와인은 오크 숙성을 피하는 편이다. 와인을 오크 배럴에서 숙성시키면 와인이 응축되면서 향이 진해지고 상큼함을 잃기 때문이다. 대신 묵직하고 부드러운 질감과 레드 와인 못지않은 복합미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수많은 청포도 가운데 오크와 가장 잘 어울리는 품종을 꼽으라면 단연 샤르도네(Chardonnay)다. 서늘한 곳에서 생산된 샤르도네는 신선한 풍미를 살리기 위해 오크 숙성을 하지 않지만, 온화하거나 더운 기후에서 자란 것은 오크 배럴에서 발효하고 숙성시키는 경우가 많다. 샤르도네의 농익은 과일 향과 오크 향이 제법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는 전통적으로 오크 숙성 샤르도네를 만들어온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샤르도네 산지인 만큼 와인 가격도 병당 2만~3만원부터 수십만원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부르고뉴 남단에 위치한 마콩(Macon)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나다. 부드러운 과일 향과 오크 향의 조화가 탁월하고 살짝 느껴지는 미네랄 향이 우아함을 더한다. 미국의 나파 밸리(Napa Valley)와 호주의 마거릿 리버(Margaret River)도 고품질 오크 숙성 샤르도네 생산지로 손꼽히는 곳이며, 향미가 진하고 보디감이 묵직한 와인을 생산한다.

신맛이 약하고 질감이 부드러운 화이트 와인도 레드 와인 애호가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다. 이런 와인은 프랑스 남부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이곳에서 재배되는 청포도 중에 비오니에(Viognier)는 신맛이 약하기로 유명한 품종이다. 특히 론(Rhone)강 유역의 콩드리외(Condrieu) 지역은 전통적으로 비오니에로만 와인을 생산해온 곳이다. 콩드리외 와인은 풍부한 과일 향에 매콤한 향신료 향과 은은한 꽃향기가 어우러져 풍미가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아비뇽(Avignon)을 둘러싸고 있는 코트 뒤 론(Cote du Rhone) 지역도 부드러운 화이트 와인 생산지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과 루산(Roussanne) 등 다양한 품종을 섞어 만드는 코트 뒤 론 화이트 와인은 입안에서 둥글게 느껴질 정도로 질감이 매끄럽다. 복숭아와 살구 등 잘 익은 과일 향이 풍성하고 톡 쏘는 향신료 향과 은은한 들꽃 향이 화사한 매력을 뽐낸다.

그래도 여전히 레드 와인을 마시고 싶다면 남은 대안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호주산 스파클링 시라즈(Sparkling Shiraz)다.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는 크리스마스를 한여름에 맞는다. 유럽에서 이어온 전통에 따라 그들은 크리스마스 런치와 디너에 고기 요리를 즐긴다. 고기에는 역시 레드 와인이 제격이지만 뜨거운 날씨에 레드 와인을 마시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들이 개발한 것이 바로 스파클링 시라즈다. 이 와인은 시라즈 품종 특유의 강인한 타닌과 풍부한 과일 향을 가지고 있지만 기포가 있기 때문에 상쾌하게 느껴진다. 한여름 밤에 바비큐가 당긴다면 아이스버킷에 담은 스파클링 시라즈를 준비해보자.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이 시원하게 깨어날 것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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