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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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시가 하나의 공화국이라면 그 나라를 지배하는 유일한 헌법은 ‘소년’일 것이다. 소년은 미성숙한 상태다. 소년은 철이 없고 소년은 겁쟁이며 소년은 지난 잘못을 반복한다. 그러나 덜 자랐기 때문에, 철들지 않아서, 잔뜩 겁먹었거나 기어이 저지르고 말아서, 소년은 혼돈과 혼란 속에 닻을 내리고 자신과의 전면전을 생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오직 소년만이 그럴 수 있다.

밀려오는 파도가 모래 위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을 지울 때 모래 위는 다시 한번 백지가 된다.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 불모의 사장 위에서 살아가는 시인은 파도를 기다리며 모래성을 쌓는다.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흔들리며 방황하기 위해. 그리하여 시가 된 것들을 시인은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인다. 한 편의 시가 하나의 공화국이라면, 그 나라를 지배하는 유일한 법은 소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독하지 못하는 슬픔과 외로움을 품에 안고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텅 빈 길 위에 서 있는 어느 소년의 둘 데 없는 마음을 상상하는 밤이 있다. 정처 없는 마음을 떠올리는 그런 밤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인과 깊은 곳에서부터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깎이고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가혹한 성숙이 인간의 불문율이라면 시인이 남겨 놓은 소년의 흔적은 인간의 내력이다. 이토록 가혹한 성숙에의 저항은 흔적화석처럼 우리 몸에 각인되어 서서히 말라 가는 존재들을 눈물 흘리며 바라본다.

소년은 뿌리내리지 않는다. 뿌리에 기대지 않고 뿌리를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외롭지만, 그 뿌리 없음은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을 종착지로 만들어 주기도 할 것이다. 걸어가는 순간 길이 생기는 사막이 가장 완전한 길인 것처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와 어디로도 가지 않을 자유는 양립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자유와 하지 않을 자유가 동등하게 보장되는 것. 그것이 소년의 의미이며 또한 시의 나라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규칙이다. 따라서 소년이 사라질 때, 자유도 사라지고 시도 주저앉는다. 시의 자리에 다른 무엇을 넣어도 궁극의 진릿값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든가 꿈이라든가, 낭만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시가 완성과 성숙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면 무엇일 수 있을까.

허연의 시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불안해서 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아서 영원한 날것의 상태를 기억하고 있는 어느 범인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불안하지 않고 불완전하지도 않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더는 부서져 반짝이는 조각들의 ‘푸른색’을 가지고 있지 않고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 또한 소멸해 버린 지 오래인 ‘나’는 어쩌면 능숙한 ‘넥타이 부대’를 닮아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별반 값어치’ 없는 세월이 흐르는 와중에도 ‘나’는 한자리에서 ‘무섭게 반짝이’는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을 발견한다. 푸른색을 잃어버린 시간에 힘들이지 않고 나를 만들었지만 만들 수 없는 ‘나’의 그늘 또한 잊지 않았다. 무섭게 반짝이는, 부서져 반짝이는 ‘나쁜 소년’을 기필코 잊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사의 노력이었으리라. 

시의 마지막 행을 읽는다.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한 소년이 서 있다”와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사이에는 도약이 있다. 소년은 미성숙한 상태다. 철들지 ‘못’했고 자꾸 잘못을 저지르니까. 그리고 그 철들지 않음이 시인을 만든다. 그러나 나쁜 소년은 미성숙을 ‘선택’한 상태다. 철들지 않았고 잘못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기로, 성숙해지지 않기로, 별반 값어치 없는 삶을 위해 어떤 것도 복무하지 않기로, 그리하여 최대한 나쁜 상태에 머물러 있기로.

나는 인생에는 정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전성기라든가 화려한 시절 같은 말도 진실과는 동떨어진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시집에 수록된 또 다른 시 ‘우물 속에 갇힌 사랑’에서 시인도 말하고 있듯 사랑은 미성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성숙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 모든 씨앗과 열매를 포기하는 것. 죽을 이유가 충분한 것”이 ‘진짜 사랑’이라면 흔들리고 실패하며 혼란 속에 있는 순간만이 인간적 순간이며, 그런 순간은 시간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다. 시간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종내에는 자기 자신이 질서가 되는 존재. 세월은 나쁜 소년을 관통하지 못한다. 소년은 시간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허연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했다.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의 정공법으로 ‘무의미의 의미’라는 두려우리만치 아름다운 미학을 창출해 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 시단의 독보적인 색깔이자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 있다. 산문집으로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고전 여행자의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등이 있다. 2006년 한국출판학술상, 2008년 한국출판평론상, 2013년 제5회 시작작품상, 2014년 제59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매일경제 문화부 선임기자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