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바이 마이 프렌드’는 두 남자아이의 우정을 통해 성장과 죽음을 그렸다. 사진 IMDB
영화 ‘굿바이 마이 프렌드’는 두 남자아이의 우정을 통해 성장과 죽음을 그렸다. 사진 IMDB

에릭은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남자아이들은 유치해서 같이 놀기 싫고 여자아이들은 싫은 건 아닌데 같이 놀긴 좀 부끄럽다. 집에 와봐야 형제도 없는 에릭은 심심하다. 이혼 후 웃음을 잃어버린 엄마는 일에만 매달리고, 아빠는 머나먼 도시로 떠나 젊은 여자와 새 삶을 시작했다. 거의 매일 혼자서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는 에릭은 인생이란 좀 무겁고 외롭고 힘든 거라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여름방학을 맞은 에릭은 뒷마당에서 혼자 전쟁놀이를 한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남자아이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에이즈에 걸렸다고 소문난 아이란 걸 알고 에릭은 가까이 있으면 자신도 병에 걸릴까 봐 긴장한다. 하지만 공기로는 전염되지 않는다고, 어릴 때 수혈하다 걸렸다고 담장 너머 아이가 말한다. 에릭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용기를 내어 높은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열한 살인데도 덱스터는 에릭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데다 주먹 한 방이면 날아갈 정도로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에릭과 똑같이 병정놀이를 즐길 줄 알고, 말하는 것도 학교 애들처럼 멍청하지 않다. 그날 이후 에릭은 병든 아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엄마가 출근하면 재빨리 덱스터에게로 달려간다.

편을 나눠 전쟁놀이도 하고 타이어 보트를 타고 슈퍼마켓을 향해 탐험도 떠난다. 덱스터와 어울리는 걸 보고 ‘호모’라 놀리던 학교 아이들과 작은 일전을 벌이고 승리의 기쁨도 누린다. 평소에는 우물거리거나 아예 말도 섞지 않던 에릭이 덱스터를 당당히 변호했고 그 결과, 아픈 걸 놀려서 미안하다는 사과까지 받아낸 것이다.

그런데도 에릭이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기어코 집어던진 것은 비겁함이나 그동안 당한 것에 대한 울분 때문은 아니었다.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자각에서 나온 자부심, 공격받아도 친구를 반드시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정의감에 기인한, 사내아이 특유의 자신만만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반격을 피해 달아날지언정 덱스터와 함께 쇼핑카트를 타고 언덕길을 내달리는 에릭의 모습은 천군만마를 이끄는 용맹한 장군, 바로 그것이었다.

덱스터는 의젓하고 똑똑한 아이다. 에릭과 마찬가지로 아빠는 없지만, 그에겐 밝고 따뜻하고 상냥한 엄마가 있다. 가족이니까 가끔이나마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면서도 신문을 읽고 잔소리만 늘어놓는 엄마의 식탁과 달리 덱스터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먹는 동안, 에릭은 오랜만에 많이 먹고 많이 떠들고 많이 웃는다.

이런 날이 영원하면 좋으련만, 덱스터는 조금만 놀면 피곤해하고, 늘 약을 챙겨 먹어야 하며, 정기적으로 병원에도 가야 한다. 그렇게 잘 웃던 덱스터의 엄마도 모두가 잠든 밤엔 아들의 꺼져가는 생명을 아파하며 소리 죽여 울음을 터뜨린다는 걸 에릭은 알게 된다.

어떻게 하면 친구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을까? 골몰하던 에릭은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찾아낸 플레밍 박사처럼, 아직 효능이 밝혀지지 않은 약이 어딘가 있을 거라며 풀숲을 뒤져 잎과 꽃을 꺾어와 덱스터에게 달인 물을 마시게 하는 실험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기발하고 엉뚱하다. 천진하다는 건 세상에 무지하다는 뜻이다. 경험이 없으므로 편견이 없고 실패한 적 없으니까 두려움도 적다. 세상을 모르니까 세상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다. 체면과 지식, 계산과 관습 때문에 어른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을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저질러버린다. 그래서 위태롭다.

덱스터와 에릭은 잡지에서 식약청이 승인해주지는 않았지만 신약을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박사에 관한 기사를 발견한다. 두 아이는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침낭을 챙겨 타이어 뗏목에 악어 풍선을 매달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자그마치 2000㎞나 떨어진 뉴올리언스를 향해 떠난다.

덱스터와 에릭은 둘이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 이 길의 끝에 병을 치료할 약도 있을 거라는 믿음도 확고하다. 하지만 덱스터의 몸은 조금씩 빠르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어두운 밤, 텐트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난 덱스터는 죽음 뒤의 세상이 두렵다고 울먹인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에릭은 자신의 낡은 운동화를 건네며 말한다.

“이걸 꼭 안고 자. 자다 깨서 무서워지면 이렇게 생각해봐. 내가 왜 냄새나는 낡은 농구화를 끌어안고 있는 거지? 난 지구에 있는 게 틀림없어. 에릭도 옆에 있을 거야.”

에릭은 지금 당장 덱스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한 덱스터를 문병 간 에릭은 그가 침대에 누워있긴 해도 함께 웃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데 안도한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죽음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덱스터와 에릭은 아이들답게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며 어른들을 놀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은 아이들의 장난을 그리 오래 허락하지 않는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성장 영화의 주인공은 평범한 일상을 떠날 때와 달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 이미 어지간한 어른보다 성숙해져 있기 마련이다. 에릭은 덱스터와 함께했던 시간을 의연하게 강물에 떠나보내는 동시에 순수했던 유년 시절과도 작별할 수 있게 된다.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를 연출했던 피터 호튼 감독의 1995년도 영화다. 병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죽음과 성장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 에이즈나 특정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변론하는 영화는 아니다.

여담으로, 에릭의 엄마는 덱스터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상식적인 안전거리’를 유지하라고 주의를 준다. “안전거리가 2m(7피트)래” 에릭은 덱스터에게 말해주며 깔깔 웃는다.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공포가 만연한 요즘, 사회적 안전거리를 지켜야 하는 우리들 자신을 씁쓸히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배우들은 울고 관객은 웃으면 삼류, 배우도 울고 관객도 울면 이류, 배우는 웃는데 관객이 울면 썩 괜찮은 작품이다. 대작은 아니지만 죽을 때 딱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원하게 될까, 한 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아름다운 영화이기도 하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