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한 포도밭.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안개가 자욱한 포도밭.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갈수록 저도주가 인기다. 소주가 17도의 벽을 깨고 16.9도로 낮아지더니, 이젠 16.5도까지 내려왔다. 이런 경향은 소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쿨 클라이밋 와인이 유행하고 있다.

쿨 클라이밋 와인이란 서늘한 기후에서 생산된 와인을 뜻한다. 와인의 알코올 함량은 포도의 당도와 비례한다. 선선한 곳에서 자란 포도는 단맛이 덜하기 때문에 와인도 도수가 낮은 편이다. 쿨 클라이밋 와인의 인기는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과 맥락을 같이한다. 취하는 것을 경계하고 음식도 기름진 것보다 담백한 것을 가까이하다 보니 와인도 가벼운 것을 선호하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알코올 도수 때문만은 아니다. 쿨 클라이밋 와인에는 분명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다.


위도, 고도, 바다가 만드는 쿨 클라이밋 와인

더운 날씨에서 생산되는 웜 클라이밋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높고 보디감이 묵직하며 풍미도 진하다. 반면에 쿨 클라이밋 와인은 보디감이 가볍고 신맛이 경쾌하며 향도 섬세하다. 전자가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다면, 후자는 향긋하게 우리 입맛을 사로잡는다.

기후는 위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와인 산지는 북위와 남위 37.5도를 기준으로 적도에 가까울수록 웜 클라이밋, 멀수록 쿨 클라이밋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위도 외에도 기후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다양하다. 우선 해발 고도를 들 수 있다. 고도가 100m 높아질 때마다 기온은 0.65°C씩 떨어진다. 대신 햇살은 더 강렬해지고 일교차도 커진다.

이탈리아반도 남쪽에 위치한 시칠리아섬은 더운 기후에 속하지만,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Etna·최고 높이 3350m)가 있는 곳이다. 이 산 중턱 1000m 고지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쿨 클라이밋 와인의 전형이다. 지중해 한가운데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맛이 상큼하다.

바다도 날씨에 영향을 준다. 한류가 흐르는 바다에 인접한 육지는 같은 위도상에 있는 다른 곳보다 기후가 훨씬 더 서늘하다. “내가 겪은 가장 추운 겨울은 7월의 샌프란시스코다”라는 말이 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로 알려졌지만, 그가 이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 유독 추운 것만은 사실이다.

10여 년 전 여름 샌프란시스코를 처음 여행했을 때 일이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자마자 옷가게부터 찾아야 했다. 너무 추워서였다. 되는대로 도톰한 윗옷 한 벌을 사 입고 다음 행선지인 금문교 전망대로 향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차가운 안개 속에서 한참을 떨다 그만 포기하고 돌아서려 할 때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서서히 드러나는 금문교의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전이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오후 7시쯤 공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바다로부터 안개가 밀려들고 있었다. 금문교를 조금씩 집어삼키는 안개를 보며 중얼거렸다. “쿨 클라이밋 와인을 만드는 주인공이 바로 너로구나!”

샌프란시스코 북쪽에는 와인 산지로 유명한 나파 밸리(Napa Valley)와 소노마(Sono­ma)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 맛이 사뭇 다르다.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의 경우 나파 밸리에서 생산된 것은 진하고 묵직하지만, 소노마에서 생산된 것은 가볍고 신선하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온 걸까? 같은 위도상에 있지만 내륙에 위치한 나파 밸리는 웜 클라이밋, 태평양에 인접한 소노마는 쿨 클라이밋으로 분류된다. 저녁이면 태평양에서 밀려드는 차가운 안개가 아침까지 소노마를 뒤덮으면서 이곳의 평균 기온을 뚝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잡채에 곁들인 데블스 코너 퀴베 브리. 스파클링 와인은 모든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사진 김상미
잡채에 곁들인 데블스 코너 퀴베 브리. 스파클링 와인은 모든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사진 김상미

쿨 클라이밋 와인 고르기

웜 클라이밋 와인이 몸을 포근히 감싸는 묵직한 패딩 같다면, 쿨 클라이밋 와인은 가벼운 셔츠나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같은 느낌이다. 쿨 클라이밋 와인이 여름에 특히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수많은 와인 중에서 어떻게 쿨 클라이밋 와인을 구별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대표적인 산지와 품종을 알아두는 것이다.

우선 눈여겨볼 화이트 와인은 독일산 리슬링(Riesling)이다. 독일은 위도가 높아 와인 산지도 북반구에서 가장 서늘한 곳으로 꼽힌다. 이곳에서 리슬링을 많이 재배하는 것도 이 품종이 추위에 강해서다. 독일 리슬링은 사과, 레몬, 복숭아, 살구 등 과일 향이 풍부하며 산도가 높아 와인이 경쾌하다. 살짝 단맛이 나고 알코올 도수는 10% 내외로 낮은 것이 많아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편하게 마실 수 있다.

샤르도네(Chardonnay)는 모든 기후에서 잘 자라는 청포도지만 기후에 따라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재주꾼이다. 캘리포니아처럼 더운 곳에서 생산된 와인은 부드럽고 묵직하지만, 프랑스 북부 샤블리(Chablis)처럼 선선한 곳에서 생산된 것은 신맛이 날카롭고 향미가 섬세하다. 호주의 태즈메이니아(Tasmania)도 최근 쿨 클라이밋 샤르도네 산지로 떠오르는 곳이다. 호주 남쪽에 있는 이 섬은 남극해와 가까워 샤르도네로 상큼한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맛을 보면 활발한 기포에서 피어나는 사과, 레몬, 자몽 등 싱싱한 과일 향이 입맛을 돋운다.

적포도 중에는 피노 누아(Pinot Noir)가 서늘한 기후에 가장 적합한 품종으로 꼽힌다. 피노 누아 와인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산이 가장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미 서부의 오리건(Oregon)과 뉴질랜드의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도 핫한 산지로 떠오르고 있다. 부르고뉴산이 우아한 풍미와 복합미를 뽐낸다면, 오리건과 뉴질랜드산은 달콤한 베리 향과 부드러운 질감이 매력적이다. 앞서 언급한 시칠리아섬의 에트나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고지대에서 자란 토착 품종으로 만든 이 와인은 맛이 경쾌하고 화산 토양 특유의 미네랄(광물질) 향이 오묘한 향미를 자아낸다. 레드 와인은 붉은 베리 향이 화사하고 매콤한 향신료 향이 세련미를 더하며, 화이트 와인은 신선한 과일 향에 허브 향이 어우러져 개성이 남다르다.

쿨 클라이밋 와인은 여름철 보양식과도 잘 어울린다. 삼계탕이나 추어탕처럼 향이 강한 음식과도 부딪히지 않고, 알코올 도수가 낮아 낙지볶음이나 해물찜처럼 매운 음식과 즐기기에도 좋다. 추어 튀김, 장어 구이, 오리고기 등 기름진 음식과 즐기면 상큼한 신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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